[박춘태 칼럼] 뉴질랜드 한인사회의 태동과 좌충우돌 ㊤

오양심 2024-01-16 (화) 17:24 1개월전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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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태/북경화쟈대 교수

 

국토 면적이 한반도의 1.2배, 국토의 50% 이상이 초지와 농지로 구성돼 있으며 세계에서 5번째로 큰 배타적경제수역(EEZ)을 보유한 나라. 바로 뉴질랜드다. 뉴질랜드 최초의 거주자는 ‘모리오리스(Morioris)족’라는 폴리네시안이었다. 그러나 1300년경 다른 폴리네시안 ‘마오리족’에 의해 점령당한다. 

 

이들 마오리족이 오늘날 뉴질랜드 원주민으로 불리어지며 독특한 마오리 문화를 형성한다. 유럽인으로서 뉴질랜드에 처음 도착한 사람은 1642년 네덜란드 아벌 타스만 탐험가와 그의 일행이었다. 이후 197년이 흐른 1839년, 영국 이주민들이 웰링턴(Wellington)에 정착한다. 이들 영국인들이 뉴질랜드에 정착한 최초의 유럽 이주민들이라 할 수 있다.

 

뉴질랜드는 인간이 정착한 마지막 땅이다. 그럼에도 경제와 복지 면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뤘다. 경제면에서 보면, 194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20여년 간 최고의 호황을 누렸다. 아울러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이른 시기에 복지 정책을 펴서 1930년대에 복지 국가를 만들었다. 세계 최초로 양로연금 제도를 실시했으며 사회보장제도를 발전시키고 있다. 이렇듯 뉴질랜드는 일찌감치 보다 진화된 국가를 만들고자 하는 역동성으로 꿈틀댔다.

 

한국과 뉴질랜드와의 인연은 한국전쟁 및 1951년 콜롬보 플랜에서 시작된다, 콜롬보 플랜은 협동적 경제 개발을 위한 국제 협약으로 뉴질랜드는 1951년 설립 당시부터 1988년까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의 영어 교사들을 연수시켰으며 1차 산업인 낙농, 목축, 원예, 임업 분야에서 한국인들을 가르쳤다. 이 플랜에 의한 한국 유학생은 263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한국인의 뉴질랜드 거주 역사를 보자. 한국인의 초기 정착은 196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정착의 경로는 원양어선 및 입양 등으로 이뤄졌다. 원양 어선의 남태평양 진출이 이뤄짐에 따라 어업 전진 기지인 뉴질랜드에 정박하게 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1961년 3월 뉴질랜드 거주 한국인은 52명이었다. 이들 중 42명은 원양 어선 선원으로 추측되기에 10명만이 순수 거주자라 볼 수 있다. 앞서 한국전쟁에서 수많은 전쟁 고아들이 생겨났다. 당시 웰링턴에 거주하는 ‘스매스(Smyth)’라는 부부는 ‘더 월드 비전(The World Vision)’을 통해 한국인 고아들을 지원했는데, 이들 중 스매스 부부의 양녀로 입양된 사람이 있다. 1962년에 최초로 뉴질랜드 가정에 입양된 김성미 씨다, 그녀는 여섯 살 때인 1962년 뉴질랜드에 도착했는데, 놀랍게도 한복을 입고 왔다고 한다. 양부모는 처음 본 한국인의 옷, 아름다운 한복에 그만 매료되었다.

 

1987년 이전만 해도 뉴질랜드의 이민 정책은 영국, 영연방 국가 출신의 이민자를 선호했다. 그러다가 1987년에 이르러 아시아인 대상 우호적인 이민 정책이 뒤따른다. 그 주된 이유는 뉴질랜드의 부족 직업군을 아사아의 고급 인력으로 대체할 필요성과 경제의 활성화를 도모함에 있었다. 이는 뉴질랜드인, 특히 생산연령 인구의 해외 유출도 한몫 했다.

 

1990년 뉴질랜드 이민 정책에 실질적인 변화가 나타나면서 한국인 이민 사회가 새 지평을 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본격적으로 1990년대 초부터 정착과 더불어 한국인들의 폭넓은 행보가 시작되었다. 뉴질랜드로의 이민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강렬한 희망이 지배적이었다. 오염되지 않은 대자연, 삶의 질, 보건, 교육과 같은 면에서 호감이 갔기 때문이다. 특히 자녀 교육, 복지, 생활환경은 주요 키워드였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뉴질랜드에서 한국이라는 나라가 생소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익숙한 것도 아니었다. 놀라왔던 점은 현지 ‘키위’(Kiwi·뉴질랜드인을 부르는 일반적인 말)들이 한국을 찾기 위해 지도를 펴고 찾는 경우도 꽤 있었다. 일본에 대한 인지도와는 사뭇 대조적으로, 이러한 현상은 국력의 차이도 있었지만 양국 간의 문화·경제적 교류, 정치적 관계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문화와 생활양식을 받아들이는 것도, 현지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도 쉽지 않았다. 생각과 삶이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한국인들은 언어와 문화 장벽을 허물기 위한 치열한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마치 금덩어리를 캐내기 위해 갱도를 파낸다는 각오가 필요한 것처럼. 그 시간들 속에서 견디고 버티며 살아남고자 서로를 의지했다. 그렇게 해서 한인사회를 통합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다양한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는 여러 계층의 한인 대표가 부족했다. 때문에 지역사회와의 연대도 원활히 이뤄지지 않았다. 문화 장벽, 문화 차이가 얼마나 큰 지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현지 키위(뉴질랜드인을 부르는 일반적인 말) 친구 집에 갔다. 커피를 가져오는데, 깜짝 놀랐다. 머그컵에 가득 채웠는데, 하마터면 넘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카페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커피잔에 커피를 가득 채워서 흘릴까봐 조심스럽게 가져 오는게 아닌가.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싑지 않은 뉴질랜드 문화였다. 지금이야 많이 익숙해져 있지만, 한국에서 금방 이민을 오거나 방문한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 차이는 여러 면에서 다양하게 일어났다. 키위 남성과 결혼한 한국인 여성이 있었다. 그녀가 시댁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한국 여성이 키위 시어머니를 “어머니(mum)”로 불렀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한참 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더니 드디어 한마디 던진다. “나는 네 어머니(mum)가 아니므로 ‘맘’이라고 부르지 마라!”, “내 이름이 ‘니콜(Nicole)’이므로 니콜이라고 불러라”라고 하지 않은가. 참 어이없는, 아니 기절초풍할 일이다. 시어머니께 아무런 존칭어도 없이 그냥 이름만 부르라고 한다. 그러나 뉴질랜드인들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그들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고, 그것이 서로 간에 더 애정을 쌓게 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개인주의와 가족·집단주의의 차이가 아닌가 한다. 이러함에도 사회적·경제적인 상하계급이 크게 구분돼 있지 않고, 국민들 사이의 인간 존중, 규범 준수, 그리고 평등 정신은 뉴질랜드를 선진복지국가로 이끄는 원동력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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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대 뉴질랜드 이민자들 모습<사진출처= 뉴질랜드 한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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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대 뉴질랜드 초기 이주민들 모습<사진출처= 뉴질랜드 한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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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10월 팔머스토 노스(Palmerston North)에서 열린 제1차 한인총회 후 친목을 다지는 모습<사진출처= 뉴질랜드 한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