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만난 사람) 금부남매(錦釜男妹) 사랑의 생명 애틋한 사연

김우영 2020-02-18 (화) 02:29 4년전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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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청남도 금산골에 사는 이준영 동생이 부산에서 암으로 투병중인 누나를 살리기 위해서 밤낮으로 뛰고 있다. 근래에는 유트브를 통한 약을 구입 투약해본 결과 신기하리만큼 완치에 가깝게 치료되어 잔잔한 감동이 되고 있다. 이를 일컬어 주변에서 ‘금부남매(錦山釜山男妹) 사랑의 생명 애틋한 사연’에 갈채를 보내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 금산 이준영 동생한테는 3살 위의 부산 이영순 누나가 있다. ‘이영순 곰탕’ 창업주인 누나가 몇 년 전 위암이 발생되어 서울 아산병원에서 위를 거의 절개하고 1차 항암치료로 겨우 살아나나 싶었다. 그런데 2년만에 재발되어 결국 난소와 갈비 등으로 전이되어 38차례의 항암치료로 거의 삶을 포기했었다.

  이 때 층남 금산(錦山)의 이준영 동생이 부산(釜山) 이영순 누이를 살리기 위하여 피눈물나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민간에서 알려진 약을 구하거나 여기 저기 알아보아 암 치료에 도움이 되는 것은 천 리, 만 리를 멀다않고 약을 구하여 병구완애 일상을 제치고 뛰어 다녔다. 그러던 끝에 마침 해외 유트브에서 암에 좋다는 약과 국내 개그맨이 유트브를 통하여 명약을 소개한다. 반신반의 하면서 약을 구하여 누나에게 보내주었다.

 

 지성이면 감천일까? 그 후 부산 이영순 누나는 이준영 동생이 구입하여 보낸 약으로 암이 치료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누나 주변에서도 같이 복용을 하고 효과를 보고 있다고 한다.

  이준영 동생은 얼마 전 누나 완치 정도가 궁금하여 부산을 방문했다. 이제 병원에 가지 않고 동생에게 스스로 밥을 차려 내주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단다. 지금도 복용중인데 병원에 가서 검진결과 면역수치와 혈액도 거의 정상이고 항암치료는 안해도 한단다.

  앞으로 한 달 뒤 다시 검사를 한다. 제발 이대로 호전되어 병이 치유되길 간절히 바란단다. 다른 환자의 경우 이 정도 중병이면 산소 호흡기 꼽고 연명하는 모습이어야 할 터인데 신기하기까지 했다. 문병차 부산을 방문한 동생을 손수 운전하여 잘 가라며 기차역까지 마중을 해주는 것을 보고 마음이 놓였다고 한다.

  부산 누나의 병세 회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다는 이준영 동생은 부산 이영순 누나가 그냥 누나가 아니다. 지난 부산에서 어려운 시절 아버지, 어머니를 대신하여 업어 키우고 먹여 살린 누나이기에 더욱 애틋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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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금산에 사는 이준영 동생은 시와 수필을 쓰는 문학도이다. 한때 문학단체 활동을 하며 전국을 순회하며 문화행사를 펼쳐는 한편, 금산문화의집 운영위원으로 참여하여 금산문화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또한 구수한 입담으로 각종 문화행사 사회를 맛깔스럽게 잘하여 이곳 저곳 행사장 초대를 다니느라고 바쁘다. 그리고 노래를 애절하게 잘 부르며 경쾌한 하모니카 연주로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그리고 금산지역에서 ‘틈새봉사단’을 만들어 시골에 혼자사는 할머니와 노인층을 대상으로 보일러 수리, 가전제품수선, 침대수리 등 간단한 소규모 집수리 등 뜻있는 후원자의 도움을 받아 주기적으로 자원봉사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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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에서 젊음을 보내다가 뜻한바 있어 충청남도 금산지역에 이주하여 평소 애지중지하는 애견을 키우고, 집주변에 간단한 농작물을 키우며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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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안위보다는 주변을 배려하고 보듬어주는 사람, 본인보다는 그늘진 사회를 안타까워하는 가슴 따뜻한 사람, 시골에 혼자사는 노인들의 가내 전기나 보일로 고장이 나면 부리나케 달려가 고쳐주는 틈새봉사단 이준영 단장. 또한 틈틈이 글을 쓰며 결고운 정서를 아우르는 이준영 문학가의 가족생활체험수기를 함께 살펴보자.

- 가족생활 체험수기

  온갖 역경과 고난을 이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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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준 영

□ 여는 시

내 어릴 적 감나무 동네 감나무 

윤 부잣집 감나무

툭--!
소리에 뛰쳐나간 누부야는

떨어진 홍시하나 주어 들지만

부잣집 할미 쟁쟁걸음

뒷 담 돌아서 하늘보고 땅을 봐도

흔적만 남아그렇구나

요놈의 가시나들 빠르기가

족제비 같아

궁시렁 --- 궁시렁---엄마 젖 기다리다

쪽- 쪽-

입 벌리는 내 동생 뒤로

부잣집 할미의 찢어 진 눈매가

으깨진 홍시 속 가시로 박힐 때

아직 어린 누부야는

마른 침 꼴깍 삼킨다
 - 이준영 문학가 詩 ‘누부야 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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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 시(詩)는 어린 누나가 사랑하는 동생들에게 주워온 홍시를 떠 먹일 때 그 감사함 마음을 담아 쓴 ‘누부야 홍시’.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온갖 역경과 고난을 이기고 오늘날 전국 최고의 곰탕공장으로 성공한 누나 이야기 입니다. 자랑할 것도 없고 구차한 살림살이 애닮고 한많은 시집살이 한국 여인들이 어찌 이만한 고생안하고 살았겠냐? 하겠지만, 결코 좌절하지 않고 ‘운명아 비켜라 내가 나간다!’의 가족생활사 체험수기 입니다.

  위기가 오면 더욱 예지롭게 헤쳐나가는 정신으로 무장한 누나의 이야기. 현재, 이 글을 보는 모든 분들도 쉽게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 졸필이나마 기억 저편 편린을 끌어내어 사랑하는 누나의 아픔을 달래보고자 합니다.   기억의 한계도 있고 누나에게도 자료를 모우고 메모를 한 후 이 글과 누나의 메모를 합쳐 자서전 형식으로 내어볼까 합니다. 명절이 왔고 이즈음 목사가 친딸을 죽이고, 보챈다고 3층에서 두 달된 애기를 던지는 비정한 엄마. 그런 어두운 뉴스를 보면서 조금이나마 가족 사랑을 생각하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2. 동전 1백원으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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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참곰탕 이영순 대표

  3살 연상의 누나는 6.25 동란이 치열하던 그 시절 나라의 장래가 너무나 어둡고 곳 곳에 굶주림과 추위와 헐벗은 국민을 국가도 어찌할 수 없던 암흑의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가부장사회, 남존여비 사상이 너무나 심하여 누나의 탄생은 폭력적이고 무지한 아버지로 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심지어 포대기 싸서 죽이라는 극언마저 함부로 내뱉던 우리 아버지.

  아버지 4세 때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아버지 위로 나이 많은 누나들 4분 계시어 어렵사리 얻게된 외동아들 우리 아부지. 일제 대동아 전쟁과 6.25 전란의 난리에 끌려가면 꼼짝없이 죽는 판이니 아버지는 동갑내기 조카와 술을 가득 마신 후 우측 손 엄지와 검지를 작두에 서로 짤라 버리는 장애를 스스로 만들어 총 못쓰는 데 데려갈 이유가 없어서 그렇게 살아남은 우리 아버지.당시는 한반도 남자들 숫자가 여성대비 7백만 모자라 굳이 입이나 덜자고 보내는 민며느리 시대도 아니련만 거의 집 집 마다 두 집 살림을 하는 편. 그래도 울 엄마는 그것과는 상관없이 만주로 가시려다 3.8선이 가로막혀 부산의 친척집 머물다 나이든 큰 고모의 꼬임에 속아 훗날 저토록 폭력적 신랑에게 시집을 오게 됩니다. 


  오래지 않아 먼저 결혼한 처가 나타나지만 자식이 없고 엄마는 곧 태기가 있어 자식을 낳기 시작하여 내리 7명이나 낳으셨습니다. 당시의 어른들은 왜 그토록 폭력이 심했는지. 이 집 저 집 도망가서 남의 부엌에서 울고 있는 여인들도 많이 볼 수 있었지요. 엄마는 견디다 못하여 도망가려 했다는데, 울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을 합니다.

  “너 도망가면 자식새끼들 전부 죽인다?"

  그 말에 도망도 못가고 살아온 게 어쩌다 부부사이 봄날이 오면 또 한 명 태어나고 참으로 썩은 새끼줄 목 매어달고 사셨던 우리 엄마였습니다.  태생적으로 빈곤에 흙수저는 고사하고 그런 혼란속에서 태어난 누나는 아래로 3명의 동생들 챙기느라 초등학교를 10살에 입학을 합니다. 그것도 공부시킬 필요가 없다는 아버지 반대를 몸으로 막아선 엄마의 우김으로 겨우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 합니다. 

  그 후 경남 창녕에서 부산으로 이사를 온 후 누나의 고생은 더욱 컸지요. 밤낮없이 공장일하시는 알콜 중독자 아버지. 큰 엄마가 주는 서러움과 핍박, 힘든 근로에 하얀칼라 세라복입은 학생이 부러워 당시 유행하던 산업학교 야학을 하다 코 피가 터져 도무지 멈추질 않아 온 바닥, 의복이 피로 물들고 살아도 살아온 세월…!

  누나는 엄마랑 동생들 먹여 살리는데 자신을 가꾸거나 돌 볼 틈 없이 늦은 결혼을 정말 아무렇게나 하게 되고 동갑내기 신랑마져 32살에 신부전증으로 세상을 뜨고 맙니다.

    매형 장례식 날. 무슨 비가 그렇게 퍼붓는지 까만 우산을 받쳐준 내게 기대어 누나는 처절한 통곡으로 울었지만 거센 비 소리는 그마져 무정하게 묻어버리고 맙니다. 남겨둔 세 아이와 시모, 시동생까지 챙겨야하는 누나의 앞길은 한 마디로 장례식 주변의 흙바닥처럼 밟으면 밟는데로 푹--푹-- 꺼지는 앞날이었죠. 


  누나는 지금도 사용하는 하얀 1백원짜리 동전하나 들고 김해에서 부산으로 나오게 됩니다. 오다가 차비만큼 타고와 이제는 먼 길을 걷고 걸어서 친정이 있는 부산을 찾아듭니다. 1백원 동전은 이제는 ‘이영순 곰탕공장’ 창업으로 50억짜리 공장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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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을 누나에게 보냈더니 아침에 누나에게서 전화가 오더군요. 흐느껴 울기만 하고 습작글로 하여 누나의 심정을 다 헤아리지 못한 서운함인지. 지나온 힘든 과거가 상처딱지처럼 들춰내니 그 아픔 때문인지…?

  "누나 미안해 울지마 울지 마라구. 나 지금 설 음식 시장본단 말이야나중 전화 할 께!“

  전화 끊기고 저는 모자를 더 눌러쓰야 했고 떨어지는 눈물을 닦느라고아랫 입술을 지긋이 물어야 했습니다

.3. 눈물속에 피는 꽃  

  1백원 동전 하나에 돐도 채 되지 않은 아이를 업고 김해 외곽에서 김해읍까지 90원을 썼으니 남은 돈 10원을 들고 이제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낯선 길에서 누나는 김해읍에서 부산 친정집까지 50리 넘는 길을 걸어옵니다. 

  계란형 얼굴에다 그리 미운상이 아니라서 여기 저기 재혼 제의가 많고 유혹도 많았지만 아이 셋은 곤란하다. 둘만 데려와라. 다 버리고 와라. 누나는 자기 몸으로 낳은 새끼를 버릴 수 없어 모든 걸 포기하고 모질고 독하게 살 것이라고 그런 다짐을 했나봅니다.  

  어쩌면 32살 여리고 여린 여자에게 닥친 시련은 차라리 자기목숨 하나 버리면 세상고통 다 잊겠다 싶기도 했겠지요. 오랜 신부전증으로 세상 떠난 남편의 병원비로 생긴 빚에다 시모와 시동생까지 아이 3명에 그리 달갑게 반겨주지도 않는 친정 아버지.
 

 아직 어린 여인이 헤쳐가기엔 제 살기 바쁜 세상에 누가 도와줄 사람도 없는 터. 마지막 재산 손가락 낀 한 돈 반 의  금반지를 전당포에 맡기고 누나는 순대 장사로 나서면서 드디어 육류계통과 접하게 되었죠.

   즉, 돼지창자와 돼지피 등 어차피 재료를 구하려면 도살장 부근이여야 하고  그곳에 도매로 구해갈 순대손님도 올 것이며. 밤새 만든 순대 대야에 도마랑 그릇 소금 칼 등을 이고 손에는 순대를 덥힐 수 있는 석유곤로를  들고 등짝에 애 하나 들처업고서 그렇게 시작한 순대 장사.

  험악하고 강해야만 자리하나 차지하기 치열한 시장판의 논리, 그 중에서 죄다 칼 들고 내장 싣고 아무렇게나 차이고 던져지는 소, 돼지 머리에다 온종일 보이는 것은 피로 흥건한 바닥뿐. 등짝이나 어깨 편에 전봇대라도 하나 있으면 그게 얼마나 바람막이도 되고 잠시 졸아도 얼마나 편안한지.  어느 날은 밤새 만든 순대 보자기를 벗기다 순간 불어온 모랫 바람에 온통 모래가 덮어버려 그걸 파묻는 누나의 심사를 짐작치 않아도 얼마나 비감했음을, 누나는 그렇게 이겨 나갑니다.

  어쩌면 그런 강인함이 엄마의 DNA가 누나에게 고스란히 전수되고 엄마와 누나는 친구처럼 벗처럼, 물론 주도권은 전부 엄마. 저를 포함한 위 형 둘은 사내라고 도시에서 자라고 엄마랑 누나 여동생은 시골 촌가에 살게 되는 아버지의 두 집 살림 누나 위에 영구라는 오빠가 있었습니다. 물론 제게도 형님이지요. 이 형은 어릴 때 원인도 모르게 죽고 맙니다.

   친아들이 죽었다는 비보를 받은 엄마는 하루종일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와보니 아이는 벌써 어디 파묻어 버렸고 엄마는 그 아이의 시신도 보지 못하고 푹 푹 가슴에 묻었습니다.

   사나운 남편의 윽박지름에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어야 했습니다. 사실 이글을 쓰면서 엄마생각에 또 눈물이 나서 글을 쓰기가 …… ? 그 후 어디 점쟁이들에게 물어보면 아이로 현신한 점쟁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 약 먹었어?"

  울 엄마는 그걸 굳게 믿고 계셨고 이제는 영구형도 아버지도 큰 엄마도 친어머니도 다 돌아가셨으니 어디에도 없는 사실이 되었습니다.  엄마가 장에 가고나면 어린 셋 동생들 밥 먹이고 똥 싸면 닦아주고 겨울철 땔감이 없어 벼 싹둑 밴 벼 뿌리를 언땅에서 캐내어 흙을 털어내고 군불감하고 먹거리 군것질감 없으니 길 건너 부잣집 홍시가 ‘툭’ 떨어지는 소리는 기가 막히게 귀가 열려 맨발로 주으러 갑니다.

  지금은 넘쳐나는 먹거리지만 그때는 그 또한 귀한 것이라 마침 소리들은 부잣집 할머니 담을 재빠르게 돌아서 하늘보고 나무보고 땅을 봐도 흔적만있고, 가시나들 내 손주 먹일 것을 또 가져갔구나. 숟가락으로 ‘쪽- 쪽- 쪽-’  주은 홍시속 파서 동생들 먹인다고 정작 누나도 어린아이 인데요? 할매는 다가와서 매몰차게 노려보면 누나의 작은 등짝은 더욱 오그라 들었죠 . 

  차라리 동생들 세 명은 엄마보다 누나의 등짝에 더 업혀 살았고 제 앞가림 할 때 까지 누나의 보살핌이었음을 그 애들도 철 들어서야 알게 되었죠. 엄마를 향한 형제 모두의 효심은 동네의 자랑거리 였습니다.  

  당연히 그 선두에 누나가 있었고 혼자 본가를 지키시는 엄마께 누나가 집으로 모시려고 해도 추워도 내 집이 편하시다니 엄마 주변엔 항상 누군가 곁을 지켜드렸고 나 좋아하는 연속극 본다 하시고 그대로 영면에 드셨으니.  누나는 엄마의 젊었을 때 사진을 년대별로 화장대 앞에 두고서 지금도 엄마를 추억하며 문안인사 나누지요. 아래 막내는 엄마 뼈 뿌린 금정산 케이블카 보이는 산자락 아래 13층 최상층에 집을 사서 날 마다 엄마를 그리워하고. 생활이 어렵다 하여 자식중에 술집, 다방 분야로 풀리지 않고 징역 벌금 하나없이 바르게 살았으니 가시는 엄마의 발걸음 많이 가벼웠을 테지요.

4. 다시 누나는 

  엄마로 부터 전수받은 재래식 방법으로 생산한 곰탕 판매로 도약을 합니다. 어느 정도 지명도가 쌓이자 프리마를 탔다, 우유를 넣었다, 대형식품 회사에서 OEM 생산해보자 등 시샘과 유혹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전부 아닌 것으로 순수한 뼈 사골만 고운 것으로 판명을 받고 먹는 것에 장난치면 죽어도 싸다는 고집스러움이 있지요.

 

  한 번은 외상을 주는데 두 번째 외상 달라면 처음 것 안줘도 좋으니 오지마라는 것이지요. 그런 바탕에 더디어도 결국은 그 것이 지름길이었음을 알았지요. 사람 잃고 돈 잃는 우매함을 원천적 차단했으니까요.  공장에 전기가 끊기고 쓰레기 봉투살 돈 없어 딸 선민이랑 자기 쓰레기 들고가서 어느 아파트 쓰레기통 뒤져 조금 여유있는 봉지를 찾아 쓰레기 꽉꽉 밀어넣고 직원들 몇 개월째 월급 밀려도 동요하나 없이 평소 누나의 심정을 익히 아는 직원들이기에 무작정 믿고 따라 갑니다.
 

  장차 더욱 큰 회사가 되어도 아마 누나 회사는 노사분규가 없을 것 같습니다. 사장이 회사의 형편을 소상히 밝히고 최대로 마음을 써 해준다는 걸 직원들이 알고 있으니 말 입니다.  이제야 누나는 말 합니다. 자기를 그토록 공부 안시키고 밉다한 아버지를 다 용서한다고. 자기가 공부를 못했기에 더 강할 수 있었고 더 많은 걸 알게되어 도리어 감사하다고. 이래서 감사하고 저래서 감사하다고.

 

  지금도 누나는 저 보고 자서전을 매일같이 써 보라고 합니다. 꼭 자기 말 듣고 이래서 오늘  감사한 마음을 가지라고. 누나는 책을 많이 보니깐 역시 책 속에 진리가 있고 지혜가 있다는 걸 스스로 깨우치고 자기 것으로 만들고 ‘나는  꾼이다’ 라는 책이나 ‘꿈 꾸는 다락방’ 그런 책들도 항상 누나가 권해서 보게 됩니다. 제일 학식이 짧아 모든 것이 부족해야할 누나는 저보다 월등 앞서나가니 그 탁월한 예지로움에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한 번은 도살장 시장바닥 ‘땡순엄마’가 상당히 억세고 그 남편도 우락부락 한 그런 부부에게 몇 천 만원의 거금을 빌려주고선 돈을 갚지않고 애만 먹이다 결국 소송까지 가게 됩니다. 누나는 이 인간들에게 어떤 결정타를 먹일까 궁리하다가 땡순엄마랑 친한 여자 앞에서 차용증서를 잃었다고 역정보를 슬쩍 흘리니 담박에 돈도 빌려주지도 않고 저런다는 등 주변의 시선은 당연 누나에게 돌아오는 욕 일 수 밖어요. 판사 앞에서 누나는 차용증서를 들여 내어 보입니다.

  새파랗게 질린 그 부부는 꼼짝 못하고 변제할 수 밖에 었지요.  그런 지혜들이 누구 상의도 없이하고 요식업 망하기 십상이라도 누나가 나서면 다 살릴 수 있습니다. 방법은 다 알지만 실천을 못해서 그렇다고. 싸고 친절하고 맛나게 이렇게 퍼주어도 주인은 남는 게 있나 싶을 정도로 해주라고.

5. 해운대 좌동 재래시장 ‘이가곰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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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내가 테이블 소형탁자 4개 문밖 데크 위 야외 프라스틱 테이블 1개, 하루매상 20~30 만원도 성공이랬는데 거의 매일 80~90만원 일요일을 1백 몇 십 만 원도 올립니다.
 

  손님이 줄을 서서 먹으러 들어오는 그 집 주인은  위의 글 열거한 누나가 키운 둘째 여동생 가게입니다. 물론 누나의 헌신적인 가르침과 수단 아니면 절대로 이룰 수 없는 사실들이지요. .김해 어방동 도살장 앞 수 백 평 공장을 다 뜯어 용인 처인구 풀무원 식품물류센터내 크린공장으로 모든 걸 옮기게 됩니다. 아들에게 관리자 맡기고 크린공장에서 잘하는 것 같더니 --

  아! 몇 달 후 누나는 온통 쓰레기 같은 생산도구를 잔뜩 싣고서 버리고 떠난 공장 미쳐 다른 이가 오지않은 그 공장으로 다시 옵니다.  아시다시피 뜯고 간 공장설비 다시 맞추려면 새로 하기보다 얼마나 힘든지요. 돈은 한 푼도 없이 쓰레기 같은 도구를 같이 내리고 제가 쓰던 사무실 비품 죄다 옮겨서 연일 이곳 저곳을 끼워 맞추어 재가동을 시작합니다.  


6. 정한(情恨)어린 한 여인의 아픈 기억

  자리를 잡아가는 시간. 아직은 끝이 저만치 남아있는데 단 몇 줄의 글로 풀어내려는 우매함에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노력해보는 것입니다. 결과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미국 샌프란시스코 이완행 시인님 말씀처럼 누나의 힘들었음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 같던 지난 일들을 혈육이 나서서 이토록 어루만져 줌으로 작으나마 위안을 삼기 바랍니다. 

  기세좋게 용인으로 옮긴 공장. 수도권도 가깝고 전국 제패의 나름 큰 꿈을 품고서 한창 잘 돌아가는 것 같더니 뭔가 삐걱거림이 심상치 않게 들리더군요.

 

  관리를 맡긴 아들과 연일 부딛치고 끝내는 너는 너의 길, 나는 다시 나의길로 간다고 온갖 쓰레기 같은 도구만 챙겨서 뜯고 나와 김해 어방동 공장 으로 돌아 왔으니 아마 그때도 마음 추스리기가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부모자식 간에도 머리가 커지니 제 고집 부리고 들쳐 업은 엄마의 기억과 달리 장성한 자식의 기억에는 나타나지는 않음이라 그 또한 자식을 키워봐야 그때 심정 조금이라도 헤아려 주겠지요. 그런 저런 사연으로 사사건건 부닥치니 손을 털어버린 건 부모였습니다.
 

  "나라는 망해도 기술자는 살아간다!“ 

  우지헌. 작은 아들 친구인 지헌이는 2016년 36살의 꽉 찬 나이 임에도 장가도 안가고 김해일을 시작할 때나 용인을 갈 때나 다시 쓰레기를 들고 되돌아 온 김해공장. 이제 초현대식 전국 최고의 김해 안동공단 공장까지 오도록 어둡고 밝고 서럽고 안타까운 세월이 흐르도록 굳은 심지 하나로 친구의 엄마를 따라서 사외영업이나 기타 잡무를 묵묵히 해내는 지헌이는 쉽게 자리를 옮기고 양지를 넘나드는 이 시대 유약하고 약삭빠른 사람과 달리 전기가 끊기고 빚쟁이 의 온갖 험담도 열악한 사무실의 환경도 같이 감내하면서 예까지 오게 됩니다. 

  성공의 그날이 오면 누나는 절대로 이런 사람을 내치지 않습니다. 아마도 보다 큰 일에 반드시 쓸 수 있도록 배려를 할 것입니다. 소기의 목적을 향해 가면서 선장의 의지와 노력도 중요하지만 이토록 노점상 전봇대처럼 심신이 지칠 때 어깨 한 번 쓱 내어주는 직원이 있음에 얼마나 큰 힘이 된다는 것 자명한 사실이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지하철 옆자리 사람이 자신의 어깨에 기대어 제법 꿀잠이 들어 잠시의 곤함을 풀고 있을 때 제법 묵직한 그 사람의 낯선 머리를 싫다않고 받아준 적이 있으신지요?
 

  내 몸 하나 슬쩍 움직이면 금새 깨어날 형국임에도 일부러 꼼짝않고 어깨를 내어주는 그런 사회, 그런 이웃, 그런 직원이라면 이 사회가 온통 믿음과 사랑으로 넘쳐나지 않을런지요. 장차 더욱 큰 일을  하게 될 지헌이를 상상해 봅니다  현재까지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을 쓰긴 하여도 그토록 수 십 년간 지켜본 누나의 공장사람들 단 한 명도 분쟁이나 큰소리 나는 일 전혀없이 신기할 정도이지요. 간혹은 누구 땜에 어렵다. 누구 때문에 노동청 가야한다. 이런 일 저런 일로 법정에 선 다던가 이런 분규 한 번 없이 항상 우리직원 최고다. 정말 일 잘한다. 저 나이에 어찌 저리하는지 모르겠다. 칭찬 일색 뿐 입니다

  직원들의 그런 사장에 대한 믿음이 식품공장의 까다로운 생산공정도 잡음 하나 티클 하나 없도록 생산과 관리의 최대치를 끌어낼 수 있지 않았나 합니다. 어려운 사람이 더 어려운 사람의 입장을 헤아려 주었을 따름인지. 

  그런데도 제가 다니는 직장. 이 운송회사의 사장은 티코 작은 승용차에 공구를 싣고 타이어 펑크수리를 하던 소위 빵꾸쟁이 였습니다. 한 마디로 자수성가형 맞습니다. 자산이 수 백 억이 넘고 직원이 1백명이 넘어 섰지만 퇴직하는 직원마다 사장과 싸우고 나가니 언젠가 사장보고 물었어요.

 

  "사장님은 어찌 그리 나가는 사람마다 싸우고 나가게 되나요?"  

  돌아온 답이란 것이 자기가 박복하여 그렇다는군요. 과연 이 사장이 복이 없어 이토록 돈을 벌고 기업을 키울까요? 사장의 치부를 들이대면 돈으로 압력으로, 알량한 건달 나부랭이나 앞세우고 항상 우는 소리에 남는 것 없다.
 

 자신은 전국 요지에 땅 사고 벤츠에 운전사까지 부리면서 대출이자 때문에 돈이 안벌린다는 하는 경제논리 1년 30억 순이익 한계선 그어놓고 29억만 벌면 올해 1억 적자라고 하는 대단한 사람 입니다. 7.

 7. 이경만 소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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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분과 누나의 처음 만남을 익히 알 수 없지만  어느 날 누나는 이 분이 쓴 책

  "거래의 7가지 함정“

  기업을 하는 사장들에게 필독서로서 대기업의 횡포와 불공정한 거래, 계약 등을 피해가는 법과 상식. 사실 저는 딱딱한 내용 등으로 보다가 포기했지만누나는 교과서처럼 들여다보고 자기 것으로 공부를 했나봅니다.  무릇 공부가 무엇인가요? 스승의 강습과 교육을 자기가 받아들이는 게 공부가 아닐런지요.

  이 분은 경남 하동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1994년 38 회 행정고시로 관계에 발을 디딘 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근무중 대기업의 횡포에 수 백 억의 과징금을 부과시킨 이력에다 MB 정부에선 청와대 행정관까지 역임하셨고 위 ‘거래의 7가지함정’ 그 책을 읽어본 당시 이명박 대통령 이 극찬을 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10년을 더 할 수 있는 공직생활도 20년으로 정리하고 그간 자신이 보고 느낀 불공정한 거래의 개선과 방법을 갑의 편이 아닌 을의 입장에서 해결하고자 스스로 양지보다 음지를 택한 전직 고위 관료 이십니다.
 

  퇴직 후 지난 직위의 관계를 이득보고자 공공기관 대기업자리 다 뿌리치시고 다른 관료들이 간 길은 자기랑 맞지 않는다고 중소기업의 어려운 점  발굴해내고 그것을 해결하고 정책을 제안하는 한국 처음  공정거래 연구소를 설립하셔서 한 마디로 대기업 갑질에 대항하는 중소기업 을의 편에 서는 수 많은 중소기업 사장들에겐 등대 같은 분이시기도 합니다.  이 분이 주창하심은 불공정 거래를 개선하고 중소기업과 동반성장 하는 길만이 한국 경제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사업을 잘하거나 못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느낀 것은 사업의 촉이 있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 것은  이 분의 최근신간도서 사장의 촉에 나타나 있고 그들의 말, 행동, 눈빛, 판단, 선택 등 모든 분야에 성공의 맥이 흐르고  그 7개의 촉을 잘 다듬고 유지하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자신있게 밝히고 있답니다.
 

  한편, 지식 비타민이라고 13년째 코너를 개설하여 전국의 수많은 중소기업 사장들에게 경영전략, 리더십, 트렌드 등을 전파하는 이런 분 하고의 연계가 어떻게 이루어 졌음인지 모친의 장례식 때도 다녀가셨고 이분 역시 누나의 경영철학에 큰 도움 주신 것 감사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누나도 경영의 모범생이었음을 압니다. 

  나랏일 하는 분들, 나랏일 마치고 경험 살려 이토록 중소기업 하는 분들 그분들에게 진정 빛과 소금 아닐런지요? 3편의 마무리 이경만 공정거래 연구소장님 앞날에 더욱 햇살 가득하시길 소망합니다.

8. 나는 질경이, 세상은 아스팔트였다 

  홈 쇼핑 방송이후 주문량에 대비하여 첫 방송 2천 박스 팔릴 정도면 대성공이라고 예상했으나 단박에 거의 5천 상자의 주문량이 들어왔습니다. 불과 1~2일 내에 전국 각지로 신속하게 발송해야 함으로 프레스에 신발 깔창 찍어내듯 생산되는 제품이 아니기에 원자재의 수급, 1차 사골의 핏물과 잡티를 제거하는 공정부터 시작으로 기존의 직원들이 고마웠습니다.   온 가족의 급한 호출 가까운 지인들까지 부를 수 있는 사람 전부 다 불러내고 제품의 특성상 강한 열로 고우고 또 고아내어 일정 농도가 나올 때 까지 시간이 걸리는 것임을 봄나물 데쳐내듯 담았습니다.

  끄집어 낼 수 있는 그런 제품 아니었습니다. 본시 포장이 끝나면 일정시간 지난 후 열기를 식혔다가 냉동고에 입고를 시키건만 채 식지않은 도가니 국물을 포장만 끝나면 영하 78도의 급냉고속으로 밀어넣기 시작했습니다.

  생산제품 도가니는 밤새 급속 냉동된 후 출고를 하기 시작 전국 택배를 통하여 발송을 마치니 참가한 모두는 거의 초죽음 상태였지요. 거의 48 시간을 눈 한 번 부치지 못했으니 주문이 많아도 걱정, 작아도 걱정 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07년 저물어 가던 12월의 태안반도 앞바다에서 정박중이던 삼성의 해상크레인 결박줄이 끊어져 홍콩의 유조선과 부딛치고 태안반도의 해안가 모래와 암벽은 끈적한 원유가 덮쳐 전국에서 모여든 자원봉사자들에게 한우자조금협회의 요청으로 곰탕 17,000명분을 공급하기도 했다. 한우단지로 유명한 강원도 횡성에서 곰탕가공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횡성한우곰탕의 유명세도 공장과 더불어 더욱 바빠지게 됩니다.

9. 글의 마무리.

  누나는 힘겨운 시간이 더욱 많았을 터이지요. 이번 기회에 직접 만나 알차게 내용을 풀어 볼까 합니다. 

  식품공장의 안전과  바른 먹거리를 국가가 보증하는 HACCP도 받았습니다. 지금은 축협, 농협, 옥션 등 각종 인터넷 쇼핑몰 등에 ‘이영순 곰탕’으로 알짜 중소기업 이름을 날리더니 중소기업청장 표창장도 대전시청에서 받기도 하였습니다. 주식회사 다참의 기업정신이나 바른 먹거리를 실현 하려는 누나의 가는 길 창창한 앞날을 기대하면서 부족한 졸필 거두 렵니다.

    충남 금산에서  

    이준영  2016.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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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닫는 시

                       詩 김우영

뉘라서 편안히 태어나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지 않으리?

여기 한 여인의 정한(情恨)서린 굴곡진 삶
눈물없이는 읽지못하는 서룸 서룸의 나날

동생 셋 들쳐업고 홍시감 먹이며
처절하게 살아온 곤고한 지난 날

힘들고 어려웠던 지난날
보상이라도 받듯

이영순 다참곰탕으로 전국 최고의
육류유통업으로 자리매김

까짓 철없이 다가온 ‘암’ 이란 녀석
번지수 잘못찾아 왔다고 몰아내소서

이제 남은 길은
살만한 가치가 있고
보람과 긍지 고인 행복한 삶이 되소서
  - 김우영 작가의 詩 ‘행복한 삶’ 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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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한국어 문학박사 김우영
(아프리카 탄자니아

외교대학 한국어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