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학 수필] 광한루는 나의 놀이터요, 아이스케이크 사업장이었다

오양심 2024-05-02 (목) 06:42 15일전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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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학/ 목사, 윷놀이 세계화추진위원장

 

1956년 광한루는 초여름부터 매미 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광한루 앞에는 수학여행 버스가 도착하면 하얀 카라에 검정치마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을 꾸역꾸역 토해내고 있었다. 왁자지껄 생기가 도는 때,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악다구니를 높인다.

 

아이스케이크! 얼음과자!” 목마른 학생들은 나를 찾았고, 나는 다시 공장으로 달려가서 아이스케이크를 받아와서 팔았지만 때로는 아이스케이크가 아직 굳지 않아 발을 여는 날도 숱하게 많았다.

 

그해 나는 중학교 1학년생이었다. 중학교를 간신이 입학은 하고 교복은 남의 것을 얻어 입었는데 모자가 없고 가방도 없었다. 행상하시는 어머니께 사달라면 책보에다 싸서 매고 다니란다. “아니 중학생이 책보에다 어깨에 메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어!” 울화통이 터졌다. 중학생이면 중학생다워야지. 말해보아야 학교나 학생의 분위기를 이해 못 하시는 어머니께 짜증만 날 일이다.

 

내가 사는 곳이 정화극장 근처이기에 광한루에 가서 사람도 없이 바람에 흔들거리는 그네를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아이스케이크소리가 들린다. 지금까지 그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내 문제로 들리기는 처음이다. “! 나도 아이스케이크 장사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한 살 위인 그 형한테 어떻게 하는 거냐? 고 물었다. 친절하게도 광한루 문 앞에 있는 공장에서 받아서 팔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난 것이 강은기이다.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 달려가서 아이스케이크 통을 잡아야 한다. 오후에 오면 통이 없어 장사를 못하기 때문이다. 우선 열 개만 사서 광한루 근처에서 팔다가 다 못 팔아도 등교 시간이 되면 학교에 가야 했다.

 

우리 남원중학교는 처음에 시내 여중 근처에 큰 일본 요정 터에서 공부하다가 향교리로 이사를 한 첫해였다. 학교에 가서는 매일 운동장 흙을 나르고 풀을 뽑았던 추억만이 남는다. 나는 학교 앞 보리밭에다 아이스케이크 통을 숨기고 교실에 들어간다. 수업이 끝나고 통을 찾으면 몇 개 남아 있던 아이스케이크가 다 녹아버렸다. 어느 날에는 네 개가 남았는데 그냥 녹이기가 아까워서 수업 들어가기 전에 아이스케이크를 다 먹고 들어갔다가 배탈이 나기도 하였다.

 

아이스케이크 장사는 돈 버는 것이 아니다. 가끔 아이스케기 장사로 고학하였다는 무용담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영웅담을 과장한 것 이리라. 나는 아이스케이크 장사하여서 모자와 가방을 내 손으로 산 기억밖에 없다.

 

어머니는 소위 딸라돈 이라는 고리대금을 얻어 이자 물어주기에 고달픈 생애를 살고 있었다. 새벽부터 발발거리며 뛰어다니지만 우리는 그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우리도 공부하고 부지런히 일하면 잘살게 될 것이라는 환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스케이크 장사를 해서 돈을 벌지는 못했어도 강은기라는 친구를 만난 것이 내 인생에 큰 보람된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는 나보다도 한 살 많았다. 한번은 광한루 밑바닥에서 둘이 만났다.

 

얼굴은 햇빛에 검게 타고 땀에 젖어 찌푸린 흉한 얼굴을 서로 바라보며 누군가가 말했다. “남에게 팔기만 하지 말고 우리도 한번 먹어 보자! 아이스케이크!” “그러자!” 해서 서로의 통을 열어보니 두 사람에게 한 개의 아이스케이크밖에 없었다. 그래서 둘이 서로 한번 베어먹고, 한번 빨면서 아이스케이크 파티를 한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남원중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사범학교 시험을 쳐서 떨어져 결국 광주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2학년 때 자취하며 신문 배달을 하는 중에 419혁명에 참여하여 경찰 개머리판에 이마가 네 조각되어 부상자가 되었다. 지금도 보훈처에 등록된 국가 유공자이다.

 

하지만 강은기는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에 올라가 을지로 인쇄공이 되었었다. 그는 의협심이 강해서 부당한 처우에 항의하여 주인과 다투고 인쇄소를 전전할 때 우리는 다시 만났다. 후에 기독교방송 사장이 된 권호경 목사가 비밀리에 문건을 만들 인쇄소 찾아서 강은기를 소개하였다.

 

강은기는 모든 일꾼을 퇴근시키고 혼자서 밤새워 일하였다. 추운 겨울에 언 손으로 문선을 하고 조판을 짜서 교정을 보아 인쇄하여 기독교회관에 납품하였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세계적 문제를 일으킨 <1972년 한국 그리스도인 신앙고백>이다.

 

권호경 목사의 소개로 학생운동권의 성명서 인쇄물을 전담하였다. 박형규 목사의 해방의 길목에서 출판 이후 11회나 경찰서 중장정보부를 들락였다. 김재규 장군 최후진술서 인쇄사건이나 나의 수배를 돕던 일 때문에 고문도 당하였다.

 

<췌장암으로 60살을 일기로 생애를 마쳤을 때 장례위원회의 고문은 고은, 박형규, 한승헌을 비롯한 10명의 민주 인사였고, 공동장례위원장은 김근태, 이부영, 이창복, 이해학, 지선, 함세웅이었다. 집행위원장은 권형택이었고, 장례위원으로는 유인태, 정동영, 정대철 등 184명이 참여하였으며, 호상은 정동일, 장영달이 맡았다. 유족으로는 부인 양희선과 아버지의 세진 출판사를 이어받은 딸 강신영과 아들 강동균이 있다> -디지털 남원문화원 자료이다.

 

내가 알기로 일개 인쇄공의 장례식에 현직 국회의원이 40여 명이나 참석 한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학생운동 때 강은기가 외상으로 인쇄해준 유인물로 운동하고 국회의원까지 되었으나 막상 그 많은 인쇄물 한번 그에게 주지 못한 죄책감을 장례참석으로 꿍쳤다. 남원에는 그의 처남인 양희성 시의원이 있었지만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불쏘시개 역할을 한 남원인 강은기를 기념할 상징물 하나 남기지 않았다.

 

광한루도 성춘향의 초상화가 바뀐 것보다 더 많이 달라졌다. 잉어 떼가 놀고 원앙이 헤엄치며 건물도 들어섰다. 그네가 달렸던 나뭇가지는 이미 없어지고 줄 서서 서로 먼저 타려고 안달이던 여학생들이 없다. 관광 필수코스였던 광한루에 수학여행 차가 오지 않은 지 얼마인가. 지리산을 오르기 위해서 남원에서 내려 광한루를 들리던 등산객이 다른 역으로 돌아버린 물줄기를 바꾸는 길은 없는가?

 

나는 지금 80 나이에 윷놀이 세계화 운동과 남북이 유네스코에 인류무형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한 노력을 전념하면서 오작교 위에 새겨진 윷판 암각화를 중시한다. 칠월 칠석날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 위에서 부슬비를 맞으며 만나는 자리에 윷판이 나타나는 이야기를 들려주려 서울에서 관광버스까지 불러들인다. 나는 광한루를 춘향이를 <업고 놀자>에서 <벗고 놀자>로 마약같이 관능화 하기보다 자연스럽게 왁자지껄 윷놀이하는 편안한 쉼터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