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작가의 新 베트남 紀行-(상편) 인도차이나반도의 숨겨진 보석, 베트남으로

김우영 2019-08-03 (토) 12:42 4년전 2064  

 김우영작가의 新 베트남 紀行-(상편) 인도차이나반도의 숨겨진 보석, 베트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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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자, 아오자이의 나라 베트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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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공항을 출발 인도차이나반도의 숨겨진 보석 ‘베트남’으로 가기 위해 호치민행 ‘대한항공 UN 681호’ 44F 좌석에 앉았다. 공항 활주로에는 벌써 하루를 접는 듯 사위에 어둠을 뿌리고 있었다. 밀림과 열사의 나라 베트남을 향하여 시속 9백km, 고도 2만 피이드 상공을 5시간동안 날아 검푸른 통킹만과 남지나해 위를 경유하여 낯설고 우리와 가까운 나라 베트남으로 간다. 비행기가 기체를 심하게 흔들며 이륙을 시작하고 기내의 안내방송이 흘러 나온다.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여러분을 호치민시까지 모시게 될 기장입니다. 이곳 인천공항을 출발 약 5시간에 걸쳐 운항하여 도착지인 호치민 탄숏나트 공항에는 오전 12시 9분에 도착 할 예정입니다.”

 안전벨트를 착용하라는 스튜디어스의 눈짓에 벨트를 허리에 감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시간 후에 만날 낯선 이국땅 베트남을 생각해 봤다.  베트남(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아니 우리에게 월남으로 더 잘 알려진 전쟁과 아오자이의 나라. 지난 1964년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자유수호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명분 없는 전쟁에 참여를 했다. 이제와 생각하니 남의 나라 민족해방전선에 참여하는 우울한 만남으로 시작되었고, 이것이 바로 미국 주도의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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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때 미국의 요청(박정희 전 대통령이 미국에 국군파병을 희망했다는 설도 있다 )에 의하여 우리 한국군은 1964년 베트남의 남부 휴양도시인 붕타우에 비 전투부대인 태권도와 의료진파병으로 시작되면서 한국과 월남의 미묘한 운명적인 만남의 블록이 형성된다. 그 후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월맹군에게 패망하기 직전 에 파병된 한국군도 철수를 한다. 남베트남이 월맹 호치명군에 의해 공산화된 이후 한국과 베트남은 한동안 정치적인 문제로 소강상태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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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년 후. 1992년 12월 한국이 37번째 베트남과 수교국으로 정식 발족하여 양국에 대사관을 설치하고 국교 정상화를 맺는다. 이로써 한국이 베트남의 국내 교역면에서 6억불을 넘기며 현재 베트남내 전 세계 투자 순위 3위에 달하고 있다. 근래에는 민간과 정부 등 각 분야에서 고르게 상호접촉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1만여명이 넘는 한인 2세, 3세 즉, 이른바 ‘라이따이한’들이 있어 우리의 관심을 더욱 유발시키고 있다. 

 한참 눈을 감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 기내에서 뚜--뚜--하고 신호음이 들린다. 객석 앞 전면에 펼쳐진 스크린에 우리의 행선지 이동경로가 비행기로 투영되어 지도와 함께 동적이동(動的移動)을 한다. 우리가 탄 비행기가 한반도 제주해협 위를 지나 일본 해협 상공 위를 날고 있는 모습이 스크린에 손에 잡힐 듯 아이들 장난감마냥 나타난다.

 중국 상해 부근의 상공에 접근 타이빼이 인근 하늘을 선회하는가 싶더니 중국 광주와 홍콩, 통킹만 상공을 지난다. 몇 시간 후이면 남지나해를 거처 베트남 호치민으로 들어선다는 행로 움직임이 예상된다. 불과 몇 년 전 만해도 그저 몇시에 출발 몇시에 도착예정이었는데 이제는 우리들이 타는 비행기 행로를 수시로 스크린 화면에 담아 보여주고 있어 참으로 여행이 생동감 있어 좋았다. 동행한 H 신문사의 C부장이 한 마디 거든다.

 “거, 참-- 시상 좋다아. 우리가 날고 여그가 긍께 저시기 지도처럼 남지나해란 말이여!” 

 “그럼요, 예전 우리들의 선배 국군 장병들은 부산항을 출발하여 월남에 오려면 무려 1주일이나 걸렸다는군요.” 

 “1주일만에 배 멀미에 고생, 고생을 허여 오던 월남을 이제는 5시간만에 횡단하였으니 말이여!” 

 “예, 세월 좋아졌습니다. C부장님.”

 비행기가 착륙 준비를 하는지 약간 흔들리며 기내방송이 나온다.

 “승객 여러분. 이제 곧 호치민 공항에 도착하니 안전벨트를 꼭 착용하시고 항공기가 착륙한 후 벨트를 풀어 안전하게 내리시어 입구에 준비된 리무진 버스에 승차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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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쟁 당시 남베트남 정부군이 마지막 저항했다던 탄숏나트 공항) 

                               
 대한항공 트랩을 내려 월남 땅 밤하늘을 보았으나 현지 시간  12시가 넘어 주변은 깜깜한 허공이었다. 서둘러 버스에 오르니 기내에서 미쳐 보지 못했던 외국인이 여럿이 눈에 띄었다. 미국인 일본인, 필리핀 등 많은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버스에 어우러져 승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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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여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내겐 1975년 4월 30일 바로 어제와 같이 느껴진다. 그 날은 참으로 맑은 날씨였다. 내 생애에 가장 맑은 날씨였다.”

  이렇게 회고한 베트남의 참전작가 바오닌(남. 하노이 출생)의 말이 생각났다. 또 그의 유명한 소설 전쟁의 슬픔(Worrow of War. 1999.7 예담출판사 번역소개)의 본문중에 이런 내용이 생각났다.

 “날 미워하지마. 동지 우리 같은 전차병들은 항상 시체더미 사이로 다니지. 우리 전차 바퀴에는 시체에서 떨어져 나온 살 조각들이 붙어 다닐 정도야. 그 썩은 살덩이 냄새를 씻어내려면 전차의 몸체를 강물에 넣어야 돼. 그래서 그랬나봐. 그 놈이 여자시체를 내동이치고 함부로 하는걸 보니 참을 수 없었어. 그 놈을 죽였어야 하는 건데. 하지만 정말 네가 아니었다면 난 살인을 저질렀겠지. 그래봐야 소용도 없는 일인데. 우리도 다 똑같이 뭐. 시체 바로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먹고 잠도 자니까. 누구든 말도 안되는 핑계로 변명 할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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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은 전쟁의 슬픔이란 소설의 주인공 ‘키엔’의 부대가 남베트남의 공수부대가 끝까지 저항하던 이곳 탄숏나트 공항을 점령한 뒤, 같은 어느 포병과 전차부대장이 싸우던 장면을 묘사한 소설 내용중 일부이다. 막바지 월남전의 허무한 내용을 적나라하게 그린 한 단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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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건너편 공항 활주로 저만치 외등 사이로 A자형 시멘트벙커가 보인다. 당시 미국이 공군 군사기지로 사용했다던 이 벙커에 미군 전투기를 은폐시키고 저 산간 밀림지의 베트콩을 공격하기 위해서 B-52 전투기로 대량의 융단폭격을 가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무자비한 전쟁에 소름이 끼친다.  허무한 이념의 대립과 무서운 전쟁에 대한 생각으로 치닫던중 활주로를 달리던 리무진 버스가 대합실 앞에 미끄러지듯 멈췄다.

 큰 짐칸에서 한 무더기의 짐이 일시적으로 내어던지듯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인솔자의 뒤를 따라 나서자 잠시 베트남 호치민시의 현지 안내인 듯한 사람이 이곳으로 오라고 손짓한다. 미리 준비된 버스에 다시 올라타면서 물벼락처럼 확 -- 달려드는 것이 있었다. 열대의 나라다운  특유의 무더위였다.

 “이크— 이,  더워?” 

 “ 5시간의 긴 비행 끝에 겨우 환영인사가 찌는 듯한 베트남의 무더위냐?”

 하고 일행중 누군가가 여행 뒤의 짜증 섞인 한숨을 내뱄었다. 한국 인천공항을 출발 할 때는 찬 바람으로 긴 소매옷을 여미었으나 이곳 베트남에 오니 무더위로 인하여 벌써 이마에 땀이 송알송알 솟기 시작한다. 현지 사간으로 자정을 넘긴 늦은 시간이라서 호텔에 여장을 풀고 룸 메이트(H신문사 C부장.)와 다소 베트남의 첫날밤 인상을 주고 받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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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내일 아침부터 떠날 베트남의 행선지를 호텔방 천정에 그려봤다. 이 나라 중부지방인 후에시의 왕릉 방문을 시작으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 하노이, 바다의 숲 하룡만下龍灣, 송차반도의 천연항인 다낭, 남지나해의 해변소도시 퀴논, 굴지의 리조트 해안도시인 아름다운 나트랑 항구, 옛 남베트남의 사이공이었던 호치민시, 해변휴양지 붕타우, 수상도시 메콩델타, 베트남 전쟁당시 해방전의 거점지인 구찌터널, 다시 호치민시, 우리의 핏줄인 라이따이한과의 만남, 베트남의 대표적인 작가 ‘구엔 반 봉’의 전쟁소설 ‘사이공의 흰옷’에 실제 주인공인 ‘웬 티 쩌우' 선생과의 사이공 강 선상에서의 만남 등. 
                
 2. 완벽한 여행자가 한 번 꼭 가봐야 할 ‘후에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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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꼬끼오--꼬끼오--”

 새볔닭이 운다. 문득 잠이 꺴다. 내 고향 이불속 꿈속인가 싶어 불현듯 눈을 뜨니 더블 침대가 있고 그 위에 함께 온 룸메이트가 쿨-- 쿨-- 잠을 자고 있지 않은가?
 
 ‘아! 여기는 베트남 호치민시의 호텔인데 어찌하여 시가지 한복판에서 새벽닭이 우는고오?

 반가움과 의아함이 교차한 가운데 창의 커텐을 활짝 젖혔다. 그러자 저만치 아래 2층 단아한 가옥의 마당가에 서성거리는 우리의 알록달록한 토종닭이 ‘꼬끼오-- 꼬끼오--’ 하고 울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우리의 것이 최고여! 바로 우리의 것이 여기에 있었구나. 한국의 농촌에서도 사라져가는 우리의 토종이 바로 여기에 있다니 오호통제(嗚呼痛哉)라!‘

 호치민의 아침은 비교적 싱그러운 초여름 바람같은 기온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거리는 벌써 자전거와 오토바이, 시클로(Cyclo. 인력거)가 붐비게 오가고 있었다. 호치민시 인구가 4백만명이라는 거대한 이 도시의 행렬의 물결은 마치 길거리에 규칙적으로 잘 펴진 로드레일이 길 위를 자동적으로 휘감고 움직이는 거대한 인파의 물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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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이로 흰색 아오자이를 입은 아가씨들이 옆구리 보드라운 살결(!)을 살짜기 드러내며 치마자락을 펄럭이고 출근하는 모습이 참으로 싱그러워 보였다. 또 시가지의 매연방지와 뜨거운 태양볕으로 부터 고운 피부를 보호하려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 반을 수건으로 가리고 아오자이를 입은 아가씨들이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타고 휙-- 휙-- 지나는 모습이 이채롭다.

 베트남하면 월남전쟁, 또 월맹의 베트콩을 연상이 되는지라 모자를 눌러쓰고 얼굴을 수건으로 가린 모습이 마치 호치민 외각을 잇는 구찌터널의 여전사(女戰士)를 연상하게 하는 것은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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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베트남 정부군이 공수부대가 마지막까지 피비린내 나게 저항했다던 탄숀낫트 공항에 도착 ‘후에시’로 가는 국내 비행수속을 밟았다. 공항주변엔 시클로와 택시 운전사 잡상인들이 요란하게 따라붙어 호객행위를 한다. 공항에서 호텔에 이르기까지 라이타와 껌, 등 잡상인 아줌마와 어린아이들이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어떤 때는 너무 귀찮게 굴어 신경질이 날 정도였다. 이런 현상은 가까운 필자가 여러번 방문했던 동남아권인 중국, 몽고 등과 다를 게 없었다.

 승객을 실은 항공기는 천천히 기체를 흔들며 탄숏낫트 공항을 이륙했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베트남 호치민시는 참으로 싱그럽고 아름다움 자연 그 자체였다. 호치민시를 좌우로 흐르는 사이공강과 지류, 그 옆으로 나무와 숲들이 무성히 신록의 띠를 두르고 있었고 시가지의 집들이 게딱지처럼 옹기종기 붙어 사람이 사는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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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만치 파랗게 펼쳐지는 산맥과 푸른 나무로 뒤덮힌 정글, 그 옆으로 넘실대며 흐르는 강물과 작은 지류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물벼락처럼 확- 끼얹는 듯한 무더위와 칙칙한 정글, 그 사이 사이로 넓다랗게 펼쳐진 월남 특유의 풍요로운 델타(Delta) 이 나라 젖줄인 풍족한 강물 등 아! 아름다운 나라 인도차이나반도인 베트남, 베트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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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항에 도착하니 이곳도 역시 무더운 여름날씨이다. 공항 광장에는 택시 운전사들의 호객과 시클로, 자전거와 많은 사람들로 붐벼 왁자지껄 시끄럽다.
베트남의 중부권 도시 ‘후에시’는 베트남 최후의 왕조인 원조(元朝 1802-1945년)의 도읍이다. 일찌기 세계 유네스코의 한 관계자는 후에시(훼)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다.

 “여행자가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도시이다.” 

 “극찬해야 할 건축상의 시(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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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말은 이곳 후에왕릉을 아주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다. 베트남 전쟁의 영웅 국부(國父) ‘호치민’이 태어나 자란 ‘후에시’ 중심가를 유유히 흐르는 후옹강 주위에는 왕궁과 사원, 황제묘와 품위 있는 건축물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후에시 인근에 있는 다낭항의 번화함이나 호치민시 같은 소음은 거의 없다.

 조용히 성안을 걷고 있으면 당시 격조있던 왕조시대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하이비스커스의 붉은 색이 눈부신 아름다움과 고도(古都)의 커다란 성벽과 해자(성 주위에 파 놓은 연못)로 둘러쌓인 왕궁은 자뭇 고요롭기까지 하다. 후에시는 후웅강을 사이에 두고 신 시가지와 구 시가지로 나뉜다. 이 두 곳을 잇는 찬티에 다리와 후스앙 다리로 나뉘는데 우리의 한강 철교 같은 분위기이다.

 왕궁으로 가는 시민광장에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그 옆으로 흐르는 작은 시냇물은 오랜 후에시의 왕조에 역사를 휘감고 오늘도 흐르고 있었다. 저만치 사회주의 특유의 붉은 베트남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일명 베트남 ‘국기게양대’이다. 1809년 자롱 왕 시대에 만들어져 왕궁문에 접해있는 이곳은 대좌(臺座) 3층 형식으로 되어있고 놓이는 17.4m로써 탑 꼭대기까지 합하면 29.52m가 된다. 현재의 건물은 1969년 세워진 것으로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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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행은 왕궁을 구경하기 위해서 들뜬 마음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줄을 잇고 들어섰다. 높다란 왕궁문은 민망왕 때 창건하여 칸딘 왕 때 재건되었다. 돌계단 위에 2층으로 되어있는 중국풍의 건물로 문의 입구는 3곳이다. 중앙문은 황제가 외출할 때만 사용되었고 이 문에는 불사조가 그려져 있는데 오문(午門)이다. 이 말은 정오가 되면 이 건물 위에 태양이 걸린다는 뜻이다.

 또 왕궁 주변에는 동바강을 비롯하여 4개의 강이 흐른다. 중국의 자금성을 본 따 만들었다는 왕궁문 정면에는 태화전(太和殿)이 있었다. 빨간색 지붕의 커다란 단층 건물인데 황제의 즉위식이 행하여졌던 곳이다. 황제가 앉았던 금박의자와 대좌가 한가운데 있다.

 자롱왕이 처음 건설했다던 이곳을 조금지나자 연못과 배전(拜殿)이 있고 바로 앞에는 돌 계단이 있는데 차례차례 3단의 넓은 공간으로 되어 있고 좌우에는 당시 귀족들이 서 있던 위치가 계급순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태화전에서 왼쪽으로 가면 원조(元朝)의 보제사(菩堤寺) 현임각(顯臨閣)이 있다.

 왕궁 초입에는 베트남 전쟁 말기 당시 사이공 시내에서 타락한 월남 정부와 미국을 저주하며 분신자살을 하여 저 유명한 ‘턱광덕’ 스님의 기록이 있었다. 당시 턱 스님이 후에시에서 사이공까지 타고 간 차량도 보존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정원에는 역대 왕 이름을 적어놓은 청동솥과 대포 9개가 각 각 있었다.

 현재 태화전 뒤쪽은 깨끗하게 정리되었지만 대부분의 건물이 베트남 전쟁중에 파괴되어 아무 것도 남아 있질 않아 이곳도 역시 베트남 전쟁의 참상을 엿볼 수 있었다.

 “지식있는 선진문화의 대국인 미국이 어쩌면 이렇게 참혹하게 세계적 문화유산을 파괴하

였을까?”

 “아무리 전쟁중의 적국(敵國)이라지만 소중한 문화유산은 부수질 말아야 할텐데?”

 넓은 왕궁 전역에 걸쳐 철저하게 부숴진 벽돌과 헝크러진 건물의 잔재를 보며 함께 동행한 어느 시인의 자조 섞인 말이다.

3. 잠시 情을 붙이고 대화 나누었던 ‘환티홍’ 꽁까이 잊을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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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행한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의 김남일(충북 청주 거주)선생이 말했다.

 “김 선생님. 이곳 베트남을 이렇게 표현하면 어떨까요. ‘전쟁통에 잠시 손을 놓쳐버린 누이의 손 같은 나라’로 말이예요."

 “야 드억. 안 로이 노이 둥! (좋습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더듬거리는 베트남어로 응답을 하니 김 작가도 베트남어로 대답을 한다.

 “씬 깜 언 안!(고맙습니다)!”

 만지면 놓칠 듯, 놓으면 아까운 듯 연인 같고 누이 같은 보드라운 나라 베트남. 1년 내내 푸르런 산이 있고 파아란 벼가 들녘에서 자라고 그 옆으로 푸르런 강물이 흐르는 뜨거운 햇볕과 나트랑(나짱)의 녹주색 남지해의 강물. 시클로와 꽁까이 처녀들이 야자수와 나무가 즐비한 거리를 아오자이 치마자락을 휘-휘- 날리며 지나가는 역동적이며 풍광이 수려한 베트남.

 후에왕릉을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성벽 해자(하천)부근에 민속무용을 하러 나온 여고생들이 예쁜 아오자이 차림으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이를 촬영하기 위해 후에시 방송국 기자들이 진지하게 여고생들에게 카메라를 담아내고 있었다.

 아쉽지만 이들을 뒤로하고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가는데 베트남 특유의 잡상인들이 달라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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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 떼엔 1달라, 레 떼엔 1달라(값이 싸다 1달라)” 

 “노우 노우, 또 이 콩 껀 까이 나이, (싫다, 나는 이것이 필요없다) 노우 노우, 또 이 콩 껀 까이 나이.”

 하고 손사레를 쳐도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바짝 끝까지 따라 붙는 것 이었다. 그러다 옆에 있는 흰색 아오자이 차림의 자전거를 탄 한 처녀를 보았다. 날렵하게 몸이 빠진 예쁜 처녀(환티홍)가 필자에게 베트남어로 계속 얘기한다. 싫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일행은 차를 타고 인근에 있는 동바시장에 쇼핑를 하러 갔다. 아오자이를 한 벌 사기 위해서이다. 시장입구에서 부터 빛바랜 우표첩, 베트남의 사진첩, 라이타, 껌 등을 좌판에 깔고 파는 상인들, 팔이 하나 없거나 허름한 옷을 질질 끌며 구걸을 하는 행색이 초라한 이곳 사람들. 발 딛을 틈도 없이 붐비는 동바시장은 후에시 동바강을 옆을 끼고 있는 우리나라의 남대문 시장 같은 서민시장이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 카메라를 잡자 옆에 있던 10세 안팎의 소년이 셔터를 눌러 준단다. ‘오우케이’하고 감사의 표시를 했다. 얼굴에 땟국물이 주르르 흘리며 허름하게 옷을 걸친 이 소년은 손을 내밀며  ‘1달라, 1달라?’하며 달라 붙는다. 측은한 생각이 들어 주머니를 뒤져 1달라를 주었다. 그랬더니 그 옆의 한 소녀가 또 손을 내민다. 다시 1달러를 주었다.

 그러자 또 옆으로 한 떼의 어린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손을 내민다. 너무 심했던지 후에의 현지 안내원인 ‘미스터 끙’이 뜯어 말리고 그들을 보낸다. 잠시 눈을 돌리니 아뿔사! 그 옆으로 아까 후에왕릉에서부터 웃으며 유난히 접근하던 ‘환티홍’ 꽁까이가 이곳까지 따라와 웃고 서 있지 않은가?

 잠시 후 버스가 움직이고 우리가 묶을 호텔로 옮겼다. 지난 4천여년의 긴 역사를 가진 베트남은 투쟁과 외침의 한 서린 나라였다. 중국의 오랜 남진침략과 지배, 18세기 프랑스의 오랜 식민지 생활, 일본의 침략, 미국의 전쟁 등.
 
 이러는 과정에서 이들은 많은 시련을 겪었다. 우리가 일제 36년 압제의 그늘과 6.25라는 전쟁의 상흔을 겪었던 것처럼. 가난에 찌든 이들을 보면서 우리의 지나간 배고픈 시절이 생각이나자 눈물이 핑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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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에 도착 여장을 풀고 있자 호텔 웨이터로부터 밖에 손님이 찾아왔단다. 이역만리 베트남에까지 누가 나를 찾을까 하고 의아심에 정문에 나가보니 아까 후에왕릉에서부터 물건을 사라며 달라 붙던 ‘환티홍’이란 처녀가 어느새 고옵게 아오자이를 차림으로 웃고 서 있진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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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이렅 부이 드억 갑 안(만나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러더니 얼굴 옆으로 손바닥을 두 손으로 대며 요염하게 웃는다. 무슨 뜻인지 몰라 호텔

웨이터에게 물으니

 “오늘밤 연인이 되고 싶대요. 손님이 좋으니 그냥 하룻밤만이래요?”

 “오호 통제라!”

 몇 년 전 중국 내몽고(內蒙古) ‘포두(包頭)를 갔을 때 만났던 우산을 쓴 '띵 짜우’란 미모의 여인이 불현듯 떠올랐다. 말이 통하진 않지만 유난히 별이 총총히 떠 손안에 잡힐 듯 환상적인 몽고에서의 밤. 이슬맞은 초원위 춤판에서 못추는 춤으로 서로 ‘보디 랭귀지(!)로 주고 받던 ’띵 짜우‘란 여인의 눈을 닮은 듯한 베트남 후에시의 환티홍 꽁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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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에시는 ‘자주와 자유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다.’라고 말하여 유명한 베트남 근대사의 국부(國父) 호치민(1969년 사망)이 출생하고 원조 제1대 황제(1802년-)에서 부터 13대 왕조인 바오다이 황제(1945년)에 이르기까지 역대 왕릉이 자리한 곳이다.

 동카인 왕릉, 티에우찌 왕릉, 카이딘 왕릉, 투둑왕릉 등 전제정권 시기의 대규모의 호화로웠던 베트남 문화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도시였다. 그래서 미국 내셔널 지오그래픽 선정 ‘완벽한 여행자가 일생에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곳 50곳’으로 선정하였다. 베트남 후에시는 문명과 자연이 잘 조화된 비경의 중부도시였다.

 어떤 이가 말한 것처럼 캄보디아 앙코르 왓트가 신(神)의 도시라면 베트남 후에시는 왕(王)들의 도시라는 평가가 적합하였다. 지금은 통일이 되어 없어졌지만 후에시는 DMZ라는 곳이 있었다. 1954년부터 1975년까지 북위 17도선을 남북으로 나뉘어 이른바 월남과 월맹으로 상징적 경계선이 있는데 하노이 방향 북쪽으로 17km정도 가면 이 경계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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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도 역시 많은 자전거와 시클로, 오토바이 등의 행렬이 도시 길가에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길가 한쪽에서는 빵이나 팥밥 또는 퍼(베트남 가락국수. 3,000-4,000동 우리나라 돈으로는 400원 정도)로 아침을 먹는 근로자들의 서민적 모습이 눈에 자주 띈다.

 투둑왕릉을 가기 위하여 후에시를 지나는데 안내원이 말한다. 저기가 바로 국부 호치민이 공부하던 ‘쿠억호크’라는 학교란다. 시내 길가에 있는 쿠억호크는 당시는 남자학교였지만 지금은 남녀 공학 고등학교가 되었단다. 벽돌 건물로 교정은 녹색으로 뒤 덮혀 우리나라의 대학교 같이 넓고 여유가 있다. 교실에는 낡은 책상과 의자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이곳에서는 주로 문학과 수학을 가르친다고 했다.

 후에시에서 7km정도 가면 투둑황제의 묘가 있다. 이 왕궁은 누가 보아도 산 속 남향에 위치하여 한 눈에 명당이라는 생각이 이내 들만큼 위치가 좋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마침 도착한 시간이 저녁나절로 황혼이 물들어 가고 있었다.산으로 둘러쌓인 주변은 조용한 산세에 적막감마저 들어 을씨년스러웠다.
 
 오랜 세월 전에 자리한 제4대 투둑황제(1848-1883년)의 왕궁이어서 그런지 계단과 대리석 등이 고생창연 하였다. 이끼 낀 돌계단 입구의 가장자리에는 금방 승천이라도 할 듯 용의 무늬가 새겨진 돌이 기염을 토하고 누워 있었다. 위로 올라가자 대전 양 옆에 도열한 투둑왕의 신하들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같이 키가 무척 작았다. 약 1m 40cm정도 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실제 키는 이 보다 더 컸는데 투둑왕이 키가 작아 신하들을 더욱 작게 조형하여 세워 놓았다고 한다.

 이 왕궁은 넓은 별장처럼 조용한 건물로써 그림과 같은 아름다운 정경이었다.1864년부터 1867년까지 약 3년에 걸쳐서 완공하였다고 한다. 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에 커다란 연못이 있고 그 주위에는 조전(釣殿)과 시원한 목조건물이 있다. 연못 왼쪽에 있는 계단으로 올라가면 황제를 모신 절이 있다. 그 뒤에는 황제의 공적을 기라는 묘비가 있고 바깥쪽에는 베트남의 국화(國花)인  연꽃을 새겨놓은 탑이 서 있었다.

 투둑왕궁을 다 둘러보고 나오는데 저만치 붉은 와인 색깔에 물들은 산 정상에 우리나라의 산불전망대 같은 조그만 원두막이 보였다. 그러자 문득 치열한 월남전 당시 베트콩을 감시하던 우리 청룡부대의 적 관망대처럼 보였다.

 “저것이 혹시 월남전 당시 우리 국군들이 사용하던 정글의 전방 적 주시용 관망대가 아닐까요?”

 “어허 그으럼 우리를 지금껏 저 관망대가 감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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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