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양심 칼럼] 한국인보다 더 한글을 사랑한 사람들

오양심 2024-04-23 (화) 11:49 12일전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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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양심/ 한글세계화운동연합 이사장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우리나라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육이오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지구촌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다. 빈곤과 홍수와 가뭄으로 명실상부 세계최악의 빈민국이라고 일컫는 아프리카의 소말리아보다 더 황폐되었고 가난에 찌들었다. 세종대왕이 창제해 주신 한글은 제 구실을 하지 못하고 수 백년동안 무용지물이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비참한 조선 땅을 보며 반응한 사람들이 있었다. 세계 각국의 20대 청년들이었다. 그들은 장래가 촉망되었지만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조선 땅을 선택했다. 몇 개월 동안 배를 타고 한국에 들어와서 헌신하고 봉사하면서 생애 전부를 바쳤다.

 

그때 미국의 헐버트는 23세였다. 조선 말기에 육영공원 교사로 내한했다. 한국에 정착하면서부터 한글의 중요성을 깨우쳤다. 조선인들은 배우기 쉽고 우수한 자신의 나라 글자인 한글보다 중국 글자인 한자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헐버트는 스스로 한글을 공부한지 3년 만에, 세계최초로, 지구촌의 산천, 풍토, 사회, 학술 등을 소개한 선비나 백성이 꼭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뜻으로 쓴, 한글 세계지리서 사민필지(士民必知, 1889)’를 출간했다.

 

또한 헐버트는 일제강점기에는 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독립을 위해 힘썼다.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도 한국의 자주독립을 지지하는 글을 서재필이 주관하는 잡지에 발표하면서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했다. 정부수립 후에는 국빈으로 초대받아 우리나라를 방문했으나 안타깝게 병사(病死)하고 말았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헐버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한 살 때 죽은 그의 아들이 묻혀 있는, 양화진 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프랭크 스코필드는 28세 영국인이었다. 조선 말기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내한했다. 영어로 강의를 하다가 한국어를 공부하여, 한국인들과 의사소통을 잘하기 위해 아예 한국어로 강의했다. 한국생활에 충실하기 위해 돌처럼 굳세고 호랑이처럼 무섭지만 한국을 잘 돕겠다는 뜻으로 성과 이름을,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어로 바꿨다.

 

삼일운동 때 석호필의 한국사랑은 눈부셨다. 독립운동 현장을 직접 카메라에 담아, 일본인의 만행을 비난하고 고발하는 글을 영자신문에 실었다. 눈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한국의 실상과, 일본인의 잔혹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우리나라에서 영구 정착한 스코필드는 끝내는 한국에서 여생을 마쳤고,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랬다. 육이오 전쟁이 끝난 후 지구촌에서 가장 가난했던 우리나라의 아침인사는 밥 먹었냐?’였다. 전 국토가 초토화 되었을 때, 외국의 선교사들이 대거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먹을 것을 제공해 주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해 놓았으나 글을 배우지 못해서 까막눈이 된 국민들에게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번 싸워도 위태로움이 없다는 것을 한글로 가르쳐 주었다.

 

국가에서는 의무교육을 실시했고,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들은 자식들에게 무식(無識)을 대물려 주지 않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맸다. 그때 국민의 윤리와 정신적인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한 국민교육헌장은 학생은 물론 우리나라 전 국민의 정신적 이념이 되었다.

 

우리 모두는 한국인보다 더 한글을 사랑한 외국인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들 덕분에 세종대왕이 창제해주신 우리나라 고유의 글자인 한글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고 지금은 인류의 언어가 되었다. 봉사와 희생정신으로 인간애를 보여주면서 한글꽃을 피워준 그들을, 우리는 영원히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