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양심 칼럼] 이름값은 가격이 아니다

오양심 2020-05-22 (금) 09:11 3년전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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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양심 칼럼니스트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인사유명호사유피人死留名虎死留皮)’는 명언이 있다. 이름값을 잘하여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한글이름, 시호, 묘호, 존호, 긴 이름 등을 배우면서, 더러는 미소도 지어가면서, 삶의 값어치를 점검해야 한다.

 

금수현(1919~1992), ‘세모시 옥색치마 금박물린 저 댕기가/ 창공을 차고 나와……,’라는 그네를 작곡했다. 본명은 김수현이고,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했다.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의 뿌리를 말살시키려고, 창씨개명을 강요한, 일제 강점기를 거친 광복이후에, 순 한글이름인 금수현으로 개명했다. 한국이름 짓기의 선구자 역할을 한 그는 자녀들에게도 금난새(대한민국 대표 지휘자), 금우리, 금누리라는 이름을 선물했다.

 

조선 전기 국왕 이름은 열 두자가 기본이었다. 시호는 살아있을 때 세운 업적을 바탕으로 붙이는 이름이다. 조선의 제3대 임금인 태종(이방원)의 시호는 국가 기강을 확고히 세웠다는 뜻으로 공정을 붙여 공정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다. 뒤이어 임금이 된 조선의 제4대 임금인 세종의 시호는 태종이 만든 규범을 잘 지켰다는 뜻에서 장헌을 붙여,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이다.

 

모효는 임금이나 많은 업적을 남긴 신하, 뛰어난 학자가 죽은 뒤에 그 공덕을 기리며 붙이는 이름이다. 태종은 태종공정대왕’, 세종은 세종장헌대왕이라는 이름으로 넋을 기렸다. 이순신은 무예로 충성을 다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충무공이순신이라는 이름으로 넋을 기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진 사람은 조선 23대 비운의 효명세자이다. 임진왜란 이후 생전과 사후에 존호를 올리는 허례허식이 생기면서 갈수록 이름이 길어졌다.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 신하들의 아첨으로 왕의 이름이 거창하게 늘어난 것이다. 효명세자는 효명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21세에 단명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아들 헌종이 즉위한 뒤 효명세자의 신분이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왕으로 높여졌다가 훗날 황제에까지 추대되었다. 그의 정식 이름은 홍운성렬선광준상이라는 존호를 비롯하여 16차례에 걸쳐, 신호와 존호가 붙었다.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치중달화계력협기강수경목준혜연지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 으로 무려 117자에 달한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긴 이름은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깡 무드셀라 구름위 허리케인에 담벼락 서생원에 고양이 고양이는 바둑이 바둑이는 돌돌이라는 72자로 된 이름이다. 1970년대 중반, 지금의 JTBC의 전신인 동양방송(TBC)에서 서영춘과 임희춘 콤비가 주역을 맡아 연기했던 코미디프로에서 탄생했다.

 

서대감(서영춘)5대 독자(임희춘)의 장수를 기원하는 이름을 지으려고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갔고, 그가 무병장수한다는 의미의 이름이나 단어는 죄다 갖다 붙이는 이름이 탄생했다. 점쟁이는 이름을 지어주면서 위험한 일을 당했을 때 한자라도 빠뜨리면 죽는다고 경고했다. 어느 날 5대 독자가 물에 빠지자 하인들은 주인의 엄명대로, 긴 이름을 하나도 빠짐없이 부르려다 구조 시간을 놓치고 말았다. 오래 살기 위해 지은 긴 이름이 단명을 재촉했던 것이다. 천한 이름일수록 천명장수 한다고 천박하게 이름 지은 똥개·쇠똥이·개똥이 등의 코미디도 있다.

 

호랑이가 죽어서 좋은 가죽을 남기듯이, 우리는 시대적인 변화도 익혀가면서, 이름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야 한다. 세상은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겨레가 있다. 나는 누구인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누구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름값, 나이값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뒤돌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