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 읽는 편지] 책을 읽다가 / 유영만

김인수 2018-11-09 (금) 23:23 5년전 665  

 

책에게 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오는 것 같습니다.
평생의 누군가가 언덕을 넘어 내게로 와서
말을 건네 오듯 말입니다.
저 언덕 너머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사랑하고 죽어 가는지
혹은, 어떤 빛깔의 나무와 풀이 
닥쳐오는 운명의 바람을 견디고 있는지...

책이란 살아 움직이는
어떤 영적인 존재인 것 같습니다.
해서, 때론
영혼의 갈급함 속으로
물처럼 흘러들기도 하지요.
그 흐름은 마치 취기와도 같아서
잠시나마 삶의 곤고함과 남루함을 잊기도 합니다.
그러나 깨어보면
변할 것 하나 없는 여전한 현실이라서
허망하거나 부질없기도 하지만
그나마 여전히 남아있는 그 취기에 기대어
또 하루하루를 견디어 가는 것이지요

그렇게,
읽다보면 책은
삶과 그 살아있음의
쓸쓸한 지평 위를 자라나는
한 그루의 튼실한 나무와도 같습니다.
밀하자면
하나의 책이 가지를 뻗어 가고
그 부단한 가지뻗음으로
나무가 스스로 제 모습을 갖추어
인연이 닿는 책들은
그 인연이 호명하는 책으로
마치 숙명처럼 가지를 뻗고 잎을 틔우고
때론 씨를 뿌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아마도
깊고 너른 숲이 되어가는
아프고 힘겨운 여정에 다름아닐 것입니다

하여,
간절히 소망하느니
진실로 진실로
저 삶의 나루에 끝끝내 이르기 전에
아주 작고 아주 평범한 숲이라도
온전히 만나게 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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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시인. 육군훈련소 참모장 준장이다>

-인산(仁山)편지 중에서/ 김인수 시인. 육군훈련소 참모장 준장

11월로 접어들면서 낮은 점점 짧아져 금세 어둠이 세상을 덮습니다. 퇴근할 무렵이면 날은 벌써 깊은 어둠에 잠겨 있습니다. 누구는 여름철에는 날이 너무 환해 퇴근하는 게 망설여졌는데 겨울로 가까이 가면서 퇴근할 맛이 난다고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자연의 섭리는 참 오묘합니다. 1년 365일 순환하는 이치가 어쩌면 그렇게도 절묘하게 이어지는지 놀랄 때가 많습니다. 경탄을 넘어 경외로 이어집니다. 그러니 자연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순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가을비치고는 제법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저녁이 되면서는 바람도 많이 불었습니다. 아직도 많이 품고 있는 잎사귀들을 빨리 털어 내라고 나무를 독촉하는 바람인 듯합니다.

이 비 그치면 기온은 영하까지 내려간다고 하니 정말이지 가을을 떠나보내는 비요,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비로 인해 제 마음은 이미 가을을 떠나보낼 채비를 다 마쳤습니다.

매일 매일 인산편지를 띄우고 나면 저는 일을 하는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독자님들의 이야기들을 살펴봅니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답장을 보내주시는 분들이 계시기에 궁금하기도 하고, 또 그 귀한 마음을 빨리 접하고 싶기도 합니다.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사람의 습관은 무섭습니다. 무엇보다도 습관은 그 무엇인가에 몰두하게 만들고, 지속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회 통념상 문제가 되는 일이 아니라면 어느 일에서든 습관을 갖는다는 건 중요합니다.

글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마다 각자 각자의 관심사가 다 다르겠지만 글을 쓰는 것도 좋은 습관 중의 하나입니다. 제가 자주 질문을 받는 것 중의 하나가 어떻게 그 장문의 글을 매일 쓸 수 있는지 궁금하다는 내용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인산편지는 하루 이틀 쓴 것이 아닙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찔끔 찔끔 써 놨다가 이어붙이는 것도 아닙니다. 일과 시간에는 일체 구상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퇴근 후에 서재에 홀로 앉고서야 드디어 인산편지로의 여행이 시작됩니다.

먼저 책을 읽습니다. 정독을 하는 책도 있고, 이것저것 아무 거나 관심 가는 부분을 읽기도 합니다. 하루에 몇 편의 시를 음미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빼먹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인산편지를 씁니다.

하루하루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어쩌면 우리의 생에 마지막 하루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의미 없이 보낸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가 그토록 단 하루만 살기를 원했던 그 하루임을 어떠한 순간에서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어제는 우리 연무대로 아주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인문학 독서 강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연세대학교 철학과 김형철 교수님을 모신 것입니다.

김형철 교수님은 워낙 유명하신 분이시니 제가 별도로 소개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저와는 인연이 있어서 지난 2016년에 용인에서 근무할 때 '선봉 인문학 리딩스쿨'의 이름으로 모셨던 적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리에서 교수님은 저를 알아보시고 반갑게 맞으셨습니다. 시를 쓰는 군인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 제가 벌이고 있는 세미책 운동에 대해 잠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육, 해, 공군, 해병대의 훈련병 아들들에게 책을 읽히는 일은 대한민국 군대를 바꾸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바꾸고, 나아가서는 세상의 미래를 바꿀 것이라는 저의 믿음과 신념을 말씀드렸습니다.

교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흔쾌히 소장하고 계신 책들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약 200권에서 300권 정도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울러 세미책에 대한 홍보도 많이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지면을 빌어 또 인사드립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강의 내용에 대해서는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함께 한 많은 간부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런 강의를 들은 건 태어나서 처음입니다.", "이 아름다운 가을날에 돈을 주고도 들을 수 없는 훌륭한 인문학 특강을 들었습니다.", "강의를 듣지 못한 사람들이 안타까울 정도였습니다." 등등 수많은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마침 교수님께서 아첨(사실에 근거)과 아부(거짓에 근거)의 차이를 설명해 주셨으니 써 먹어야겠습니다. 우리 간부들이 보여준 것은 한 치의 아부도 허용하지 않는 순도 100%의 아첨입니다.

함께 한 전우들에게 교수님을 소개하면서 저는 많은 인문학자님들을 알고 있지만 서강대학교 최진석 교수님, 연세대학교 김상근 교수님과 더불어 김형철 교수님을 대한민국의 3대 인문학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교수님의 강의가 얼마나 대단한 강의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세상은 꿈꾸는 자의 것입니다. 세상은 그 꿈을 실현하고자 움직이는 자의 것입니다. 세상의 미래는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 힘을 책에서 찾고, 그 힘을 책을 통해 길러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세미책의 후원자가 되시겠다고 하신 교수님은 천군만마인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