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쓴 글] 돼지 오줌보로 같은 생각을/ 이훈우

이훈우 2018-11-08 (목) 10:23 5년전 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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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우/ 일본한국학교 교감, 한세연 일본 본부장>

‘쓱싹, 쓱싹!’

아랫집 아저씨가 우리 집 뒷마당에서 칼을 갈고 있다. 또래 아이들 예닐곱이 둘러서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 조금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하여 둘러서 있는 아이들은 알고 있다. 그리고 아저씨께 마음속으로 뭔가를 애타게 부탁하고 있다.

내일은 우리 아버지 회갑 날이다. 그동안 어머니께서 몇 년 동안 부지런히 품앗이를 해 놓으신 덕에 큰 어려움 없이 회갑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다. 밀주(시골에서 허가 없이 비밀리에 집에서 빚는 술)는 순이네 집에서, 감주는 철교네 집에서, 오늘은 작년 영철이네 누나 결혼식 때 우리 집에서 보내주었던 돼지를, 이번에는 영철이네 집에서 우리 집에 보내 왔다.

그래서 아랫집 아저씨가 우리 집에 와서 돼지를 잡고 있는 것이다. 집에서 키우던 돼지를 직접 잡아먹기가 왠지 마음에 걸려서, 우리 마을에서는 서로 바꿔서 필요할 때 잡아먹는 일이 풍습이 되고 있다.

돼지를 잡는 일 뿐만이 아니다. 우리 마을에서는 힘든 일을 서로 거들어 주면서 품을 지고 갚는 품앗이를 한다. 한 가족의 부족한 노동력을 해결하기 위해 다른 가족들의 노동력을 빌려 쓰고 나중에 갚아주는 형태이다. 주로 가래질하기, 모내기, 물대기, 김매기, 추수, 풀베기, 지붕의 이엉엮기, 퇴비만들기, 길쌈하기 등에 집중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관혼상제 등 집안의 큰 행사가 있을 때도 품앗이를 하고 있다. 그 동안 어머니께서 회갑을 대비해서 여러 이웃집에 품앗이를 해 두었던 것들을, 내일 아버지 회갑을 맞아 기쁘게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쾌애애액..!’

아저씨가 술을 드셨을까? 평소에는 단 일격에 돼지의 숨통을 끊어 놓는데 오늘은 아무래도 술이 과하셨나 보다. 평소보다 어렵게 돼지 목을 따고 계신다. 네 다리를 꽁꽁 묶고 서너 명의 동네 아저씨들이 손으로 발로 눌러 잡고 있는데도 돼지는 발버둥을 치며 사방으로 피를 티긴다. 돼지 모습이 안쓰럽고 불쌍하다. 아저씨도 힘이 겨운지 잠시 고개를 돌린다. 그렇게 20여 분 이상 싸움을 하고 나서야 끝내 돼지가 숨을 거둔다.

아저씨는 미리 준비한 끓는 물을 부어가며 돼지 털을 능숙한 솜씨로 깎아 나가신다. 아저씨의 놀라운 솜씨에 금방 벌거숭이 돼지 한 마리가 뽀얀 속살을 드러내고 대형 도마 위에 덩그러니 놓여진다. 아저씨는 돼지 배를 가르고 창자를 꺼내서 정리하신다. 그리고 목을 딸 때 받아두었던 피(선지)를 창자 속에 부어 넣는다. 창자를 정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면 피에 소주를 조금 부어서 엉기는 것을 막는다. 창자 속에 피를 넣어서 삶아내면 그게 바로 진짜 순대인 것이다.

내가 아는 순대는 돼지 창자에 피만 넣어서 삶아내는 것이다. 맛이 끝내준다. 아쉽게도 요즘은 그런 진짜 순대를 만드는 곳을 찾기가 쉽지 않다. 재료와 맛이 다양해졌고 변했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에서 돼지를 전문으로 잡아주신 아저씨는 앞다리 하나를 챙겨 놓는다. 등골(척추에서 나오는 골수)도 아저씨 차지로, 소주 한 잔 곁들여서 날 것으로 드신다. 아저씨는 언제부터인가 돼지를 잡으실 때 맨 정신으로는 잡지 못하고 늘 술에 취해서 잡곤 하신다. ‘이젠 이 일을 그만 둬야지, 정말 그만 둬야지….’라고 혼잣말을 흘리신다.

나와 아이들은 순대를 만드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배를 갈라 내장을 정리할 때 나오는 오줌보를 원하는 것이다. 아저씨께 제발 그것에 흠집 내지 말고 잘 떼 내어서 달라고 곁에 바짝 붙어 앉아서 눈빛으로 애원하고 있다. 오늘도 아저씨는 우리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축구공처럼 완벽한 터지지 않은 돼지 오줌보를 우리에게 건네주신다. 나는 그것을 잘 씻어서 적당하게 바람을 불어넣는다. 실로 입구를 깨끗하게 묶고, 가위로 입구 부분을 잘 정리하여 균형을 맞추면, 천연가죽의 축구공이 탄생된다.

동네 아이들을 삼삼오오 짝을 지어 동네 뒷산 잔디밭으로 달려간다. 오래된 묘가 여러 개 있는 잔디밭은 언제부터인가 우리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다. 돼지 오줌보를 학교 운동장에서 차면 울퉁불퉁해서 금방 터지기 때문에 반드시 잔디밭에서 차야 한다. 힘 조절을 잘 하면서 차야지 마음 놓고 차다가는 낭패를 본다. 행여 축구를 하다가 오줌보가 터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다음 번 돼지 잡는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

돼지 오줌보로 축구를 할 때부터, 우리들은 공공의 적이 되는 것이다. 모두들 가벼운 발길질로 ‘차범근!, 이회택!’을 외쳐대면서 축구를 즐긴다. 기분이 째진다. 하지만 아무리 조심하면서 오줌보를 차도 돼지 오줌보는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얇아서 너 시간을 차고 나면 터져버리기 때문이다.

서산에서 해가 떨어지고 어둑어둑해지는 시간이 되면 우리들은 초조해진다. 돼지 오줌보가 누군가의 발길에 ‘뻥!’ 소리와 함께 터질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쯤이면 우리 모두는 같은 생각을 한다.

‘제발, 내 발길질에는 터지지 말아 줬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