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을 읽는다]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박지원

오양심 2018-11-06 (화) 19:07 5년전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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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 책표지이다>


‘붓을 들고 종이를 펼쳐 그럴듯한 생각이 떠오를지라도 미처 한 글자도 쓰기 전에 창밖에서 형방이 무릎을 꿇고 ‘하사오며’ ‘뿐이옵고’ ‘갓갓’ 등의 소리를 내며 문서를 읽어대고….’

‘넌 책에 대해 이렇게도 성의가 없으니 늘 개탄하게 된다. 너희들이 하는 일 없이 날을 보내고 어영부영 해를 보내는 걸 생각하면 어찌 몹시 애석하지 않겠니? 고추장 작은 단지 하나를 보내니 사랑방에 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을 게다. 내가 손수 담근 건데 아직 완전히 익지는 않았다.’

-본문 중에서-

김기원/공군방공포병학교장(공군대령)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이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글을 엮은, 인간적 면모가 물씬 풍기는 서간집이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 중이던 것을 박희병(서울대 국문과)교수가 처음 번역하고 소개했다.

‘연암집’에도 누락된 이 서간집은 연암의 고손인 박기양(1876~1941)이 소장했던 것을 진주의 수장가 박영철(1879~1939)이 넘겨받은 뒤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했다.

<고추장 작은 단지를 보내니>에 실린 편지들은 그가 60세 때인 안의현감 시절과 이듬해 면천군수 시절, 아들 박종의와 처남 이재성 등에게 보낸 것이다. 지방 관리의 일상생활, 아버지의 자상함과 걱정, 집안 대소사에 대한 관심, 유득공 박제가 등 동료들에 대한 평가까지 내밀함이 돋보인다.

연암 박지원은 글 한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분주한 관아생활을 묘사하는가 하면, 공부하지 않은 아들을 한참 나무란 뒤, 고추장을 보낸다는 말로 편지를 맺는 모습이 정겹다.

유득공과 박제가에 대한 언급도 흥미롭다. 애정이 듬뿍 담겼지만 비난하는 대목도 있다. 박제가가 중국에서 나온 시필을 새로 입수했음에도, 자기에게 빌려주지 않으려 한다며, 박제가를 ‘망상무도하다’(꼴 같지 않게 무례하다)고 비난한다.

유득공에 대해서는 ‘침잠하는 기상이 적어 단지 책을 빌려 박식을 뽐내기만을 좋아할 뿐이다’라고 적고 있다.

박희병 교수는 “그의 가족애, 꼼꼼하고 주도면밀한 성격, 유머러스한 면모, 강직한 성격, 특히 서화 취향을 엿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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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박지원>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문호이자 실학자로, 호는 연암(燕巖)이다. 중국 기행문집인 <열하일기>를 저술했다. 중국의 정세를 살피고, 선진 문명을 소개하는 한편, 조선에 대한 심도 있는 내부 비판을 시도한 책이다.

1786년 선공감 감역이라는 벼슬을 지냈으며, 여러 말단 벼슬을 거쳐 1792년 안의 현감에 임명되었고, 1797년 면천 군수가 되었다. 1800년 양양 부사에 승진, 이듬해 벼슬에서 물러났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고, 과학사상가인 홍대용과 함께, 조선의 주체성에 대한 깊은 고민 위에서 이용후생의 실학을 모색했다. 창조적이고 성찰적인 글쓰기를 통해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이 갖고 있던 미망과 편견, 허위의식과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유와 미의식의 지평을 몸소 열어 나갔다. 문집으로 <연암집>이 있다.

69세에 “깨끗이 목욕시켜 달라”는 유언으로 남기고 운명을 달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