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으로 쓴 글] 소낙비 내리는 교정에서/ 이훈우

이훈우 2018-11-01 (목) 17:04 5년전 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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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훈우/ 동경한국학교 교감, 한글세계화운동연합 일본본부장>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노랑우산, 파랑우산, 찢어진 우산
좁다란 골목길에 우산 셋이서
이마를 마주대고 걸어갑니다.

퇴근 무렵에 소낙비가 쏟아진다. 일본한국학교이다. 창밖을 내다보면서 초등학생 때 불렀던 <우산>이라는 노래를 나지막하게 부르고 있다.

비를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소년과 소녀의 단상을 눈 안에 넣는다. 이성에 눈떠가는 사춘기 소년소녀의 아름답고 슬픈 첫사랑의 경험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 중학교 국어책에서 읽었던 황순원의 <소나기>와 흡사하다.

소년은 개울가에서 물장난을 하고 있는 소녀를 보자, 윤 초시네 증손녀라는 것을 알아챈다. 며칠째 소녀는 물장난을 하고 있다. 소녀는 물속에서 건져낸 하얀 조약돌을 건너편에 앉아 구경하던 소년을 향하여

“이 바보야!”

하며 던진다. 소녀는 갈밭 사이 길로 달아나고 한참 뒤에는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갈꽃 저쪽으로 사라져간다. 소년은 물기 걷힌 조약돌을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소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소년은 주머니 속의 조약돌을 주무른다.

며칠째 보이지 않던 소녀가 개울가에 나타난다. 둘은 들길을 달린다. 허수아비를 흔들기도 하고, 비탈의 칡꽃을 따다가 소녀의 다친 무릎에 소년이 발라준다. 소년은 코뚜레를 꿰지 않은 송아지를 타고 소녀 앞에서 폼을 잡는다. 그러나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수숫단 속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소년은 소녀를 업어 물이 불은 개울물을 건네준다. 며칠 만에 소녀는 핼쑥한 얼굴로 개울가에 나타난다.

 

소녀의 분홍 스웨터 앞자락에는 소년의 등에 업혔을 때에 묻은 검붉은 물이 들어 있다. 갈림길에서 소녀는 대추를 건네주며 이사를 가게 되었다고 말한다.

소년은 잠자리에서

“윤초시댁두 말이 아니어. 그 많던 전답을 다 팔아버리구. 대대로 살아오던 집마저 남의 손에 넘기더니, 또 악상까지 당하는 걸 보면…… 그런데 참, 이번 계집애는 여간 잔망스럽지가 않어. 글쎄 죽기 전에 이런 말을 했다지 않어? 자기가 죽거든 입던 옷을 꼭 그대로 입혀서 묻어 달라구…….”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전해준 소녀 이야기를 듣는다. <소나기> 줄거리를 회상하고 있는데, 가난한 집 지붕처럼 비닐우산이 눈앞에서 팔랑거린다.

그때 내 고향 한국의 하동에서, 찰랑찰랑 하늘을 흔들어 대던 비닐우산 사이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방울방울 푸르게 맺힌 빗방울을 바라다보면 비닐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참 좋았다.

걸음을 걸을 때 마다 우산에서 나는 소리와 발소리 그리고 빗소리가 어우러지는 박자는 내 마음을 한없이 빨아들였다. 학창 시절 가슴 떨리게 좋아하던 여학생이랑 찢어진 비닐우산 속을 함께 걷던 하교 길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부끄러워 말 한 마디 못하고, 우산 속을 걸었던 그날따라, 우산속 여학생의 집은 왜 그렇게 가깝게 느껴졌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