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안내] 정홍순 시집/ 향단이 생각

오일영 2021-09-11 (토) 06:42 15일전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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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코리아뉴스=오일영 기자] 정홍순 시인이 2021년 9월 15일 출판사 문학의 전당/월간 시인동네에서 ‘향단이 생각’이라는 시집을 출간했다. 뿔 없는 그림자의 슬픔’ ‘물소리를 밟다’ ‘갈대는 바다를 품고 산다’ ‘바람은 갯벌에 눕지 않는다에 이어서 다섯 번째 시집이다.

                       

■ 저항정신으로 무장한 서정의 세계

 

2011년 계간 《시와사람》으로 등단한 정홍순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향단이 생각』이 문학의전당 시인선 344로 출간되었다. 정홍순 시인은 저항적 주체와의 동일성뿐만 아니라 지향하는 세계와 융합한 서정으로 유려한 저항의 목소리를 담보한다. 근대가 열리면서 함께했던 불행하고도 비극적인 세계사를 배경으로 하여 당위적인 궁극의 세계를 향한 저항의 목소리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방향을 환기시킴으로써 개인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인간으로서의 존재 의의를 확인시킨다.

 

■ 추천사

 

정홍순의 시는 역동적인 저항성이 서정성과 융합하여 독자적이면서도 독특한 그만의 목소리를 자아내고 있다. 문명비판으로서 현대시의 서정은 대체적으로 문명사회에서 소외된 혹은 잃어버린 세계를 반추하는 비극적 정조로, 또는 추억을 환기하는 애잔한 그리움의 정조로, 혹은 근원의 세계에 동화된 동일성의 목소리로 구현된다. 그러나 정홍순의 시는 서정시로서는 드물게 저항의 대상에 동화됨으로써 그만의 독자적인 길을 내고 있다. 당위의 세계를 향한 정홍순의 저항적 목소리가 현대시의 서정에 새로운 길을 냄으로써 절망의 벽에 흐릿하게 걸쳐 있는 희망을 별처럼 빛나게 한다.

― 진순애(문학평론가)

 

■ 해설 엿보기

 

역사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엎치락뒤치락하는 전복을 오가면서 발전이라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외적인 발전뿐만 아니라 정의라는 이름으로 모아지는 내적인 역사 발전에도 마디마다 혁명이 있었고 전쟁이 있었으며 저항운동이 있었다. 때문에 숭고하게 희생된 선열들의 저항정신에 동화된 정홍순의 시는 저항적일 수밖에 없다. 저항이 있어서 서정도 존재의의가 있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역사적인 저항의 사건에 동화되어, 혹은 저항적인 실존 인물에 동화되어, 나아가 민중적 삶의 처연하면서도 강인한 저력을 상기하는 방언의 목소리로, 주로 호남의 그것에 동화되어 반향하고 있다. 저항적 주체와의 동일성뿐만 아니라 지향하는 세계와 융합한 서정으로도 그의 시는 유려한 저항의 목소리를 담보한다. 근대가 열리면서 함께했던 불행하고도 비극적인 세계사를 배경으로 하여 당위적인 궁극의 세계를 향한 저항의 목소리에 천착하고 있는 것이다. 저항이 있어서, 곧 저항의 목소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지향해야 할 궁극적인 방향을 환기시킴으로써 개인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인간으로서의 존재 의의 또한 당위적으로 부여받게 하는 까닭이다.

 

사월, 비 내리는 프라하

돌사과꽃 가만가만 밤 받쳐 들었다

가로등 헤치고

수런수런 피고 있는 마로니에

눈부시지 마라

조등처럼 밝히지도 마라

라일락 언덕에 강바람이 차다

말발굽 소리, 늦은 저녁 꽃 몰아

수작 걸어본들

쳐다보지도 않는 냉이꽃

민들레꽃

우리들 천박한 얼굴로 슬프겠느냐

조선의 역사에

변주할 수 없는 드보르작의 선율이

아리랑, 아리랑 울 수 있느냐

전쟁 없는 역사는 역사도 아니다

상처 받아보지 않은 모든 것은

봄이 가기 전 떠났다

칭칭 감아 피는 등꽃 프라하

우리에게도 봄이 있다

밤새 출렁이는 프라하

업어치기 한판 걸어 내일은

꽃으로 주저앉히고 말없이 빛나는

역사 앞으로 떠나야겠다

― 「프라하의 밤」 전문

 

‘프라하의 봄’이 비록 짧은 봄이었을지라도, 그 봄이 있어서 정홍순에게 프라하의 밤은 밤새 출렁이면서 ‘내일은 꽃으로 주저앉히고 말없이 빛나는 역사 앞으로 떠날 수 있게’ 하는 저항적 서정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돌사과꽃, 냉이꽃, 민들레꽃에 동화된 프라하의 봄, 곧 프라하의 서정이 칭칭 감아 피는 등꽃처럼 상처를 감아올리며 내일로의 역사를 진행하게 하는 저항의 저력이다. “전쟁 없는 역사는 역사도 아니다”는 정홍순의 언명처럼, 그리고 ‘전쟁은 역사 발전을 위해 파괴하면서 창조하는 필요악’이라는 칸트의 명제처럼 전쟁은 이율배반적인 역사 진행의 중심에 있다. 

 

전쟁으로 혁명으로 반란으로, 곧 투쟁적 저항으로 역사가 어둠을 헤쳐 온 것처럼 “상처 받아보지 않은 모든 것은/봄이 가기 전에 떠났”듯이 “우리에게도 봄이 있”기 위해서는 전쟁이든 혁명이든 반란이든 겪어내야 한다는 정홍순이 프라하의 저항정신에 동화되어 그 봄을 예찬한다. 상처 받아보는 것을 필연으로 하여 산다는 것, 곧 상처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태의 이율배반성이다.

 

충장로 도청 앞에서 인장 명인에게, 한 자에 만오천 원씩 주고 도장을 팠다 한 달 식권 값도 더 되는 삯, 선뜻 퍼주고 도장을 팠다 탄피만 한 상아, 한글로 새겨야 깨지지 않는다고, 떨면서 파던 명인의 손끝이, 광주를 더 슬프게 하였다 팔십칠년, 망월동에는 새 무덤이 늘어났다 비석에 그 이름 새겨지는 동안, 나는 인감도장을 팠다 혁명의 유월, 도장나무 까만 열매같이 가슴마다 검정 리본 달고, 독재 목 놓아 파내고 있는 동안, 나는 상아도장을 새겼다 붉은 피 묻혀 찍지도 못할 뼈다귀, 나도 낯선 내 이름을 팠다 코끼리처럼 죽은 유월의 아들, 도장밥에 대가리 박을 때마다, 꽃보다 더, 그 이름 붉게 떠오르는 도장을 팠다

― 「도장을 팠다」 전문

 

80년 광주의 봄도 프라하의 봄처럼 혁명의 봄이듯 프라하의 저항이 광주의 저항으로 치환된다. 비록 혁명으로 완결된 것이 아니라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명명되고 있을지라도 광주의 불꽃은 혁명이다. “도장밥에 대가리 박을 때마다, 꽃보다 더, 그 이름 붉게 떠오르는 도장을” 파듯이 80년의 광주는 내일의 역사를 빛나게 할 붉은 꽃이다. 정홍순은 그 희생이, 도장밥의 붉은색처럼 그리고 붉은 꽃의 색깔보다 더 붉은, 영원히 빛날 희생이 있어서 내일의 역사는 별이 되리라고 광주의 정신을 승화시킨다. 

― 진순애(문학평론가)

 

■ 책 속에서

 

겨울 상주처럼 물집 서린 발바닥 집어넣었다 생의 조각들 조심히 디뎌가며 이생의 안부 전했다 더듬더듬 흙 속에 필사한 몸들의 방식 읽고 방종한 내 삶을 반성했다 종잇장같이 젖어 누운 첩첩 둘러 밀봉한 그들의 더 깊은 자리로 들어갔다 푸른 얼굴로 천년을 거슬러야 닿을까 또 하나의 지실(地室)에 머물러 섰다 하늘이 꽤 멀어졌다 내실의 끝 뼈의 벽 칸칸이 넘어 헤치고 격자로 새길 비문(碑文) 한 줄 몰래 도굴하였다

 

저승의 글 물고 날아가는 저 하늘에 머리터럭 한 올 묶어 휘갈겨 몇 자 쓰고 죽어야겠다

— 「카타콤」 전문

 

까맣게 그을린 아궁이가 쩍 벌어져 있다

꺼질 듯한 불씨

붉은 실 한 타래 늘어져 흐르고

사방에 짐승이 오락가락하는

그림의 제목은 리비도

잠자던 에너지가 살아나온다

춥다,

움츠린 몸이 춥다

빨랫줄에 시래기가 마른다

깜박 잊어버린 빨래

낡은 함석집 겨울 생각을 말리고 있다

허공,

다른 비상 꿈꾸며 매달아

계곡에 던져진 몸뚱어리도 있다

통점, 새

산에 한가로이 파묻은 늙은 시 속에서

드로잉으로 잡힌 한 여인의 누드가

예술이 되기까지

정지된 파도의 격정처럼 부서지기까지

은빛 강 삿대질하는 배

아랫도리 불근불근 가로질러

단단한 못에 고정되기까지

— 「리비도」 전문

 

제 몸 밀어야 간다

뿌리쳐야 갈 수 있다

널 두고는 강이 깊을 수 없고

저 산이 높을 수 없다

 

달 싣고 돌아오던 밤배 득실거리던

여기는 광양항

복판 달리는 말처럼 서서

뱃고동 울리는 중마동(中馬洞)이다

 

북간도, 평양, 연희전문학교, 후쿠오카

종말의 닻 부리고

밧줄로 묶어놓은 시

곰삭는 바람이

비리다

 

매화마을에 꽃은 가득하고

올해도 순질한 너의 시 다 읽을 수 없다

― 「중마동에서 동주를 생각하다」 전문

 

주눅 든 아이에게

날개에 바람 잔뜩 얹어 흔들어주다

 

오늘은 첫눈 받아

절망의 깊이를 고누고 있다

 

눈치 새끼들

잔등 펄럭이는 섬진강

 

휘저어

치켜 오르는 첫눈의 잔치를 놓치랴

 

고도의 절망

고도의 기쁨

 

휘몰아치는 숨소리가 깊다

 

절벽 끝으로

날카로운 별이 파르르 박혀 떨린다

 

붉다,

 

지상의 높이만큼 가늠 난다 하여도

절망의 그림은 없다

― 「첫눈에 그리다」 전문

 

가을비 부슬거리는 육모정길, 사람이 적었으면 아마 비 거두지 않았을 것이다 춘향이 누운 자리에서 시작한 길, 주자(朱子)가 발 담근 때 이른 밥이나 먹고 가자 성에 차지 않으면 배만 고프다고, 나물밥에 참기름 떨군다 청국장엔 월매 넉살이 들어가 감질나고, 향단이가 버무린 도토리묵 말랑말랑 젓가락 차며 떨어진다 봉긋 솟은 놋주발 금세 행랑에 던지고, 머루주 한입 헹구며 성삼재 넘는 동안 안개가 자꾸 불러온다 매번 춘향이로 시작하고 춘향이로 끝나는 길, 자전거 탄 씩씩한 여자 알 밴 장딴지, 비늘 털며 소나무가 용천한다 열두 자 노고할미 거웃 상단에서 흘렀으니 저 또한 이 산의 측근, 상상이 떨어지려면 죽어야 수인데, 처박고 살아서 가라고, 길목에 싸놓은 모랫더미 앞에서 브레이크 밟는다

― 「향단이 생각」 전문

 

■ 시인의 말

 

어쩌다 뒤집으면 되레 환한 때가 있다.

 

한쪽으로만 너무 썼다.

아찔하다.

 

아찔한 끝 환해지도록

타일러야겠다, 어둡다.

 

환하게 걸어가고 싶다.

 

2021년 9월

정홍순

 

 

■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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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순 시인

 

 

충남 태안 남면에서 태어나 2011년 《시와사람》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뿔 없는 그림자의 슬픔』 『물소리를 밟다』 『갈대는 바다를 품고 산다』 『바람은 갯벌에 눕지 않는다』가 있다. 〈화순문학상〉을 수상했다.

 

■ 차례

 

제1부

 

카타콤 13/입만 슬프다 14/프라하의 밤 16/비텐베르크 광장에서 18/아우슈비츠 수용소 19/람세스의 콘돔 20/리비도 22/해를 캐다 24/목이 25/아도, 아도여 26/마라의 소녀 28/익다 30/중마동에서 동주를 생각하다 31/LA 플라워 32/식물공장 33

 

제2부

 

솔포기 같은 연애 37/물의 경계 38/삼합의 겨울 40/맷돌 두부 42/장마 43/첫눈에 그리다 44/당아 46/정이품송 48/나로도 봄비 49/아이스크림 날개도 팝니다 50/부부 52/쪽보다 더 푸를 수 있는가 53/나는 악마의 선에서 살았다 54/아귀탕 56/청춘 58

 

제3부

 

향단이 생각 61/땅에 쓴 글씨 62/봄비 64/청려장 66/한때는 비적이었다 67/어깃장 68/고명 70/명자에게 72/콧구멍에 부는 바람 73/봉문이발소 74/모래가 운다 76/입동 서리 78/새우비 79/햇빛 오브제 80/도장을 팠다 82

 

제4부

 

물에 비친 산은 젖지 않는다 85/전라도 오소리 86/운조루 가빈터에서 88/돌산 갓 90/낙안온천 가는 날 92/어은골 이야기 94/근황 96/다시 삭금리에서 97/금오도 비렁길 100/선진리 벚꽃 노래 102/적벽강 103/벽파진에 서다 104/운암산에 내리는 비 106/남생이 108

 

해설 저항의 서정/진순애(문학평론가)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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