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인 탐방)서울경기지회장 김완수 수필가의 “내 큰 딸도 있어요!”

김우영 2021-01-17 (일) 10:05 3년전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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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완수 수필가·교수
경기 여주시농업기술센터소장 역임
중국 위해시향토산업발전복무대사(전문위원)
한국문화해외교류협회 서울·경기지회장
국제사이버대학교 웰빙조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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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큰 딸도 있어요!)

  ◯ 인생에서 인연이란 어떻게 맺어지나?

  1971년 3월, 큰형의 사업실패로 집안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일반 고등학교 대신 공군기술고등학교(현, 항공과학고등학교)에 입학 한 것이 내 인생의 진로를 정해 버린 것일까?

  당시 발안중학교를 졸업하고 17.8 : 1의 어려운 경쟁률을 뚫고 대전 공군교육사령부(현재는 진주로 이전)내에 위치한 공군기술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어린 나이에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1971. 3.15일 제3기생으로 입학을 하였다. 자신의 적성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다른 편대(반)보다 영어공부를 더 할 수 있다는 소문에 제1편대(반) 기상관제과를 선택하였고 3년의 군대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1974.2.1.부로 졸업과 동시에 공군하사로 임관하였다. 

  방공관제 특기를 받은 00명의 동기들 함께 30 방공관제단으로 배속 받았다. 같이 간 동기중 조00(이후는 J라고 칭한다), 손00 등과 유난히 친하게 되었던 나는 인근 주점에서 막걸리로 인연을 맺기도 하였다.  다음 날 나와 J는 팔◯산 싸이트로 발령을 받아 함께 갔다. 6개월간의 OJT교육을 이수하고 나는 00 싸이트로, J는 00 중앙 싸이트로 배속 되었다. 

  방공관제 특성상 상급부대에서 기초교육과정을 OJT형식으로 이수하고 사실상 실전 첫 근무지가 00 싸이트가 된 것이다. 책 일기를 생활화 했던 나는 많은 관제규범과 규정 등을 숙독하게 되었고 이를 방공관제 훈련을 하는 전투기에 적용하게 되었고 내무반 생활도 열심히 한 결과 2년 후에 중사로 진급하면서 강릉시내에 하숙도 하게 되었다 비번인 날은 경포대를 비롯하여 설악산까지 동해안 명소를 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즐거운 시간도 잠시, 방공관제 특기의 특성상 오지와 도시근교를 순환하는 근무제도에 따라 1976.10월에 오지인 일0산 싸이트로 전속을 가게 되었다. 하숙여건도 좋지 않아 영내 간부숙소를 이용하게 되었다. 4교대 근무(일명 crew근무)를 잠시 하다가 관제중대본부에서 방공관제 장병을 교육하는 담당하게 되었고 5년 만에 상사로도 진급하였다. 영내에 거주하며 작전상황실에서 상황이 발생하면 긴급 투입되는 역할까지 맞게 되니, 차츰 부대에서 부대장님의 필수 참모가 되기도 하였다.

  이런 상태에서 과거 팔0산 OJT교육 후 00 중앙 싸이트에서 근무하던 J가 순환근무제도에 따라 오지인 일0산 싸이트로 오게 되었다. 친한 동기 J가 오는 바람에 나는 도시지역으로 전출을 고사하고 함께 근무하기로 하였다. J는 신혼으로 관사가 필요하게 되었고, 나는 이 사실을 알고 부대장과 면담을 하여 관사 입주를 도와주었다. 마음 맞는 동기 J와의 일월산 싸이트 생활은 많은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다. 비록 나는 관제중대 본부에서 주간 근무를 하였고 J는 4교대 근무를 하였지만 후에는 BX관리관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하였다. 

  그렇게 1년여를 지나다가 30단 방공관제단 주관 각 싸이트 족구대회가 개최되면서 부대장의 지시로 우리는 함께 출전준비를 하였다. 원래 J는 원주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축구선수 생활을 했던 경력이 있어 족구공 다루는 것에 소질이 있었고 운동에 대한 안목도 많아 장병중에서 운동을 했던 선수들을 선발하여 선수단을 구성하여 훈련을 하였다. 선수단중 선임이었던 나는 주전선수보다는 코치와 지원을 하였고 30방공관제단 족구대회 본선에서 4강까지 하고 귀대한 인연으로 더욱 친하게 되었다.

  ◯ 이것이 나의 평생 인연인 집사람을 만나게 될 줄이야.....

  족구대회를 마치고 부대로 귀대한 날, 마침 일0산 싸이트 관사로 딸네 집에 오신 J의 장모님과 대면을 하게 되었다. 오징어 조림을 잘하는 J의 부인이자, 지금은 나의 큰 처제가 된 사연이 시작되었다. 

  그 날도 오징어 조림에 소주를 하면서 족구대회 이야기로 화제 중심이 되다가 내가 의무복무 7년(공군기술고등학교 무상교육 3년 + 하사관 근무기간 4년)이 끝나는 올 해로 전역 신청을 하였다는 이야기에 J장모님은 물으셨다.

  “제대후 무엇을 할 건데요?”

  “공무원을 준비하고 있으며 1차 필기시험은 합격을 하였고 조만간 면접시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결혼 할 때도 되었으니 혹시 사귀는 사람이 있는지?”  

  “아직 없어요.”

 

  조만간 시간을 내어 원주에 오면 참한 여인을 소개해 주겠다는 제의를 하셨고, 나도 뛸 듯이 기뻐서 흔쾌히 대답을 했다. 

 

  ‘쇠뿔도 단감에 빼라!’

  속담처럼 그 다음 주에 휴가를 내고 봉화 임기역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원주로 향했다. 당시 오지인 봉화 임기는 교통편이 불편하여 부대에서 출퇴근 트럭개조차를 타고 내려와 야간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상례였다. 새벽에 원주역에 내린 나는 원주역내 TMO에서 운영하는 여행 장병 간부숙소에서 잠을 보충하였고 10시쯤 일어나 이발소에 들려 머리를 손질하고 공중전화기로 J장모님께 전화를 하였다. 

 

  “따르릉 따르릉” 

 

   2번의 전화벨이 울린 후 J장모님의 반가운 목소리와 연결되었다. 원주시내 약속한 다방으로 가서 뵌 J장모님은 그야말로 나의 구세주 같은 기분이 들었다. 소개해 주기로 한 여인을 만나기 전 나에게 전해 주신 상대정보는 원주 00병원 간호사이며 나이는 25세, 그리고 원주 토박이로 여자 어머니와 절친이라며 잘 사귀어 보라고 하셨다. 잠시 후 멋진 여자가 도착하였고 J장모는 자리를 비켜 주셨다.

 

  “잘 사귀어 보라.”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첫 말을 하면서 떨려서 안절부절 못하는 나에게 말했다.

  

  “어머니 친구 분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언제 쯤 제대를 하는지 확인도 하였다. 전역신청을 하고 수속중이니 다음 달 정도에 전역을 하게 될 것 같다는 이야기와 함께 전역 후 공무원이 되기 위해 준비 중이라는 계획까지 이야기를 하였다. 서로 대면을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잘 진행되는 줄 알았고 다음날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다음날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상대방의 전화번호라도 알아 놨어야 하는데 첫 대면에 잘 진행되는 듯하여 연락처 문의를 안 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2시간여를 기다리다가 잘못된 것을 알고 J장모님께 인사차 전화를 하였다.

 

  “오늘 만나기로 했는데 안 나온 것을 보니 인연이 아닌 것 같다.”

 

  J장모님도 말씀하셨다.

 

   “실망하지 말고 다음에 다시 한 번 시간을 내서 원주에 와요.”

 

   부대로 돌아 와서 J에게 첫 소개팅을 허무하게 끝낸 이야기를 하고 아쉬움을 달랬다. 1주일 후 나는 용기를 내어 원주로 향하였다. J장모님께 연락을 드렸고 집 근처 다방에서 다시 뵙게 되었다.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J장모님께서 말씀하셨다.

 

  “내 큰 딸이 있어요.”

 

  하시고 J의 부인의 연년생 언니 이야기를 하셨다. 봉화 임기관사에 오셨을 때 내가 한 말 중 “호적상으로는 양띠 55년생이지만, 집 나이로는 말띠(1954년생)”라는 말을 기억하고 계시며 말씀하셨다.

 

  “큰 딸이 경찰관이신 아버님이 지리산 작전을 나가시면서 임신한 첫애를 딸로 출생신고를 하여 호적상으로 한 살이 많게 되었다. 실제 나이는 말띠와 같은 나이이니 한번 만나보라?”

 

  당시 개인회사 경리사원으로 근무하던 큰 딸의 연락처까지 주시며,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아니 장모님 되실 분이 맺어준 인연이라니?

  이렇게 우리 부부의 인연을 맺어준 분은 J의 장모님이면서 나의 장모님이 되셨고 덕분에 먼저 결혼한 J의 형님뻘이 되는 맏사위로 선택되어 1981.11.8.일 우리 부부는 원주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 덕분에 행복이 꽃피는 가정을 꾸리며 잘 살고 있어요.

12653133cadc8858990eb5ee3b0cbf13_1610846368_717.jpg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 손자에게 우유를 먹이고 있는 김완수 수필가의 인자함)

  40여년을 함께 생활하며 우리 부부는 아들, 딸 남매를 두었고, 장모님 닮은 아내가 아들, 딸들을 잘 키워서 준 덕분에 아들은 대신증권 00지점 부지점장으로, 딸은 키움증권, 하이증권을 거쳐 현재는 군인공제회 00과장으로 근무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고, 나 역시 공직을 마무리하고 퇴직 후에도 객원교수와 농업전문가로 활동하며 지식을 나누고, 집사람도 손주들을 돌봐 주면서 화성 시니어클럽 커피바리스타교육도 이수하고 취미생활로 시니어 클럽 커피매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제가 우리 부부의 생활을 바탕으로 제작하는 사진으로 보는 자서전 제목처럼 ‘행복이 꽃피는 집’처럼…

  이 모두가 J와의 인연, 그리고 ‘내 큰 딸도 있어요!’라고 하시며 나를 맏사위로 선택해주신 장모님 덕분이라 늘 감사하고 있다.

  87세 연세에도 불구하시고 원주시 관내 명륜동 행정복지센터에서 진행하는 각종 취미프로그램에 참여하시며 활동하시는 장모님 고맙습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12653133cadc8858990eb5ee3b0cbf13_1610846905_7022.jpg   서울경기지회장이자 경기 화성시 거주 김완수 수필가의 행복한 여정 스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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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11일 대전대림관광호텔 한중수교 제22주년맞이 김완수 수필가 등단 환영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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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6일 경기 화성 동탄 장정숙 회원 운영의 '옛날통닭 매장'에서 갖은 서울경기지회 모임에서 김완수 지회장은 화성 팔탄미 수향미 쌀을 참석자 전 회원에게 한 포대씩 선물 회원사랑을 베풀어 박수를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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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교통 이동과 집안에서 언제나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는 독서광으로 소문난 김완수 수필가의 저서 '행복한 귀농인보다 행복한 귀농이 되자!'라는 인기도서를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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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문학평론가 김우영 작가

한글세계화운동본부 대전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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