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우 수필] 비밀의 방, 나의 윤주 나의 천사⑨

이훈우 2020-05-16 (토) 07:54 3년전 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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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훈우/ 일본동경한국학교 교감

한글세계화운동연합 일본본부장

25년 전의 일이니 윤주도 벌써 30대 중반이 되었습니다. 내가 일본으로 오기 전에는 스승의 날이면 잊지 않고 우리 집에 찾아와 이런 저런 삶의 이야기들을 해주던 아이였습니다. 대도시지만 아직은 시골 모습이 남아있었던 변두리 초등학교에서 근무하던 때의 일입니다.

수학시간이었는데 아이들은 문제를 푸느라 교실은 조용했습니다.

"선생님, 경아가 많이 아픈가 봐요!"

교실의 고요함을 깨고 갑작스러운 외침에 나와 아이들은 경아한테로 시선이 쏠렸습니다. 경아는 엎드려 있었습니다.

"경아야, 어디 아프니?"

내 말에 경아는 힘들게 얼굴을 들었는데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괴로운 표정이었습니다.

"언제부터 아팠니?"

"아침부터...."

배가 많이 아픈지 경아는 배를 부여잡고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안되겠다. 누가 경아 데리고 양호실 좀 다녀오렴."

경아와 친한 영숙이와 반장이 경아를 부축하고 교실뒷문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금방 나갔던 영숙이가 교실로 뛰어오며

"선생님, 경아가 양호실에 가다가 복도에서 토했어요."

아이들의 얼굴이 찡그러졌습니다. 어떤 아이는 냄새가 난다는 듯 코를 잡았습니다. 아무도 경아를 걱정하는 모습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교실을 나가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세숫대야와 빗자루, 쓰레받기를 들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는 경아가 토한 곳으로 가서 쓰레받기에 토한 것을 쓸어서 세숫대야에 담았습니다. 엉거주춤 서서 그 아이를 보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감동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윤주입니다.

 

이십 수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무 말 없이 토한 것을 치우던 윤주의 모습에서 난 천사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사실 교사인 나도 토한 것을 치운다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은데 별 상관도 없는 윤주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그 더러운 것을 얼굴도 찌푸리지 않고 깨끗이 치우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말없이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는 윤주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사랑이란 말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내가 담임하던 6학년 1반 아이들 중 3분의 1은 고아원에서 다니는 고아였습니다. 이 아이들 중에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굵은 털이 숭숭 나 있는 종아리를 일부러 나에게 내 보이며

선생님! 공부에 지쳐서 머리가 너무 아파요. 잠시 밖에 나가 담배라도 한 대 피고와도 될까요?”

담배를 엄청 피워대던 20 살도 더 되어 보이는 남학생이 있었는가하면, 3학년도 안 되어 보이는데 6학년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는 여자아이도 있었습니다. 당시는 고아원에서 정확한 나이를 관리하지 않았었나 봅니다. 윤주도 3학년 같은 6학년인 고아원 소녀였습니다.

 

어느 날 서울 김포공항 사무실에서 학교로 전화 한 통이 왔습니다. 혹시 윤주라는 아이가 거기 학교 학생이냐고? 시골 선생님이 서울까지 올라가서 힘들게 윤주를 만나 함께 내려오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었습니다. 윤주는 소위 말하는 말썽꾸러기 학생이었습니다. 조그만 녀석이 얼마나 사고를 많이 치는지 정말 끔찍할 정도로 담임인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던 아이였습니다. 오락실을 가기 위해 공중전화기를 부수어 동전을 꺼내다가 경찰서에 잡혀가는 일은 부지기수이고,

 

잠시 내가 칠판에 판서를 한다고 돌아서 있다가 뒤돌아보면 그 사이에 교실을 도망가 나이 많은 고아원 아이들과 몰려다니며 좋지 않은 일들에 말려들곤 하던 아이였습니다.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소위 말하는 일진 같은 단체를 만들어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학생으로서 공부와는 담을 쌓았고 어른들의 말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장래를 준비하지도 않았고 그저 오늘이 즐거우면 좋은 아이였습니다. 수시로 교실에서 사라지고 수시로 경찰서에 잡혀가서 담임인 내가 각서 쓰고 아이를 빼 오는 일이 되풀이 되자 나도 대책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윤주를 붙들어다가 잘 지워지지 않는 유성 매직으로 팔뚝 위 옷을 들추면 보이는 곳에 주소와 전화번호를 적어두었던 것입니다. 그래야 사고를 쳐도 빨리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 주소와 연락처로 서울에서 전화가 왔던 것입니다.

윤주야, 공항엔 왜 갔었니?”

엄마 찾으러요.”

엄마? 엄마가 공항에 있니?”

아니요, 미국에요.”

알고 보니 고아원 원장님이 엄마의 행적을 묻는 윤주에게 미국에 있다고 말했었나 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또 하루 그렇게 많은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기다리다 그래도 오지 않는 엄마를 찾겠다고 직접 김포 공항까지 가서 안내데스크 직원에게 미국 가는 비행기표 달라고 동전들을 내 놓았다가 억류되었던 것입니다.

 

마침 내가 적어 놓은 주소와 전화가 발견되어 연락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동전은 이곳저곳의 공중전화기를 털어서 모은 돈이었습니다. 고아원의 아이들 중 사연 없는 아이가 없겠지만 윤주는 어릴 때부터 그렇게 엄마를 많이 찾았다고 합니다. 원장님은 늘 미국에 있고 돈 많이 벌어서 금방 오실테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로 위로를 하곤 했다고 합니다. 기다림에 지친 윤주는 엄마를 만나기 위해 기다림보다는 행동으로 옮겼던 것이었나 봅니다. 흔들리는 고속버스 안에서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든 윤주의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모르게 잠든 윤주의 모습은 천사인데.

 

학교에 돌아와서 원장님과 상의를 했습니다. 담임으로 있는 기간에만 윤주를 내가 데리고 있으면 안 되겠냐구요. 당시 나는 신혼이었지만 자식은 없었습니다. 부인도 선뜻 동의를 해 주었고 다행히 윤주도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것을 싫어하지 않아서 6월이 시작되던 날부터 우리 셋이는 같은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동물 농장이라고 할 만큼 토끼, , 고양이, 오리, 닭 등 여러 가지 동물들도 키우고 텃밭에는 땅콩, , 시금치, 당근, 쑥갓 등 온갖 식물들 재배했으며 중고 자가용(1985년에 나는 포니 자동차를 샀었다)을 구입하여 시간이 날 때 마다 전국 곳곳을 셋이서 여행을 많이도 다니면서 즐겁게 하루하루를 보냈었습니다. 윤주의 생활에는 절대 간섭을 하거나 행동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관심하다 할 정도로 서로가 서로의 생활을 100% 보장해주고 믿어주고 개방하면서 생활했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먹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윤주는 우리 집에 오고 난 뒤에 많이 변했습니다. 내가 변화를 기대하지도 않았고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때로는 공부하는 모습도 보여주기도 하고 친구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용감하게 앞장서고 무엇보다 나쁜 아이들과 몰려다니던 행동들을 자제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우리 집에 오고 난 뒤에도 몇 번인가는 내가 경찰서에 가는 일이 벌어지기는 했었지만 하루하루 달라지는 윤주는 우리 가족에게 행복과 보람을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가족으로까지 이어지지는 못하고 지금도 스승과 제자로 남아있지만 스승의 날이면 잊지 않고 연락을 해오는 제자입니다. 지금은 더 큰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수녀의 길을 걷고 있는 천사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우리 수녀님은 속세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저에게 연락을 해 왔습니다.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나의 천사님!

 

30 여 년 전 비가 오는 중의 서울역 광장에서 흰머리에 연로하신 옛 스승님께 중년의 신사들 십 수 명이 무릎을 꿇고 문안 인사를 드리는 감동적인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런 스승, 저런 제자들을 꿈꾸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매년 스승의 날이 되면 제자들을 한 명 한 명 떠올려봅니다. 그리고 오래 된 앨범들을 들쳐봅니다. 벌써 39권의 앨범이 쌓였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스승의 날은 지나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