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우 수필] 비밀의 방, 선생님 나의선생님Ⅱ⑧

이훈우 2020-05-16 (토) 07:52 3년전 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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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우/ 일본동경한국학교 교감
한글세계화운동연합 일본본부장

                           
  ’야! 패스, 패스! 저 쪽이 비었잖아!‘
  ’9번이 6번을 막아야지!‘
  오전이지만 여름의 땡볕은 숨이 차게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시골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핸드볼 연습을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내가 6학년 때 잘 생긴 총각 선생님이 대도시에서 우리 학교로 부임을 해 오셨습니다.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시면서 밤낮으로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깨우쳐주신 선생님입니다. 시골아이들에게 스카우트 활동을 가르쳐주셨고, 돼지오줌통으로 공차기만을 하던 우리들에게 핸드볼이라는 구기운동을 가르쳐주셔서 군내 우승까지 이끌어주신 잊지 못할 선생님이십니다. 운동부 팀을 운영하는 데는 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시골 학교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었는데 선생님은 자비를 투자하시면서 팀을 운영하셨습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빵을 모아서 선수들 간식으로 주기도 하고, 육성회가 만들어져 지원을 했지만 활동비는 언제나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나는 7번을 달고 오른쪽 윙을 담당하는 팀의 중심 선수였고 주장이기도 했었습니다.

오늘은 선생님의 손님이 오신 관계로 오후 연습은 우리들끼리 자율 연습으로 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자율연습이라고 하는 것이 왕복 30킬로미터쯤 되는 먼 산까지 달려갔다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줄을 지어 14명의 아이들은 작은 개울을 건너고 비탈을 건너 반환점까지 도달했습니다. 당시 이웃 동네에서는 누에를 키우는 집이 많았습니다. 때문에 주변 밭에는 뽕나무들이 많았고, ’오디‘라는 뽕나무 열매가 새빨갛다 못해 검은 주홍색으로 주렁주렁 달려있었습니다. 목이 마르던 참에 너무 먹고 싶어 한 개를 따서 먹었더니 세상에 이런 맛이 또 있을까요?

자연 상태에서 잘 익은 ’오디‘ 맛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천상의 맛이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꺼번에 뽕나무 밭에 기어 들어가 오디를 따 먹기 시작했습니다. 입가가 붉은색으로 변했어도 윗도리가 주홍색으로 물들었어도 아랑곳 하지 않고 먹는 곳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한 참을 그렇게 즐기고 나니 아뿔싸 시간은 4시를 넘고 있었습니다. 3시까지 돌아오라고 하셨는데…. 힘겹게 아이들을 모아서 있는 힘을 다해 학교를 향해 달렸습니다. 5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하는 우리들을 선생님은 운동장까지 나오셔서 기다리시고 계셨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유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입가에 묻은 붉은색과 옷에 물든 주홍색을 보면 아무리 대도시 출신이라고 하더라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은 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선생님은 나에게 몽둥이를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시더니 체육복을 무릎까지 걷어 올리시고는
  ’내가 너희들을 잘 못 가르쳤구나. 내가 벌을 받으마.‘
  ’주장, 때려라!‘
  ’예!?‘
  나는 내 귀를 의심했습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향해 선생님은 재차,
  ’뭐하니? 때리라고 하잖아!?‘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줄 모르고 그냥 서 있었습니다.
  ’뭐 해!?‘
  재차 선생님의 불호령이 떨어졌을 때 내 눈에는 눈물만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몽둥이를 어설프게 부여잡고 눈물만 뚝뚝 흘리며 엉거주춤 서 있었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뽀얗고 반짝반짝 빛나는 선생님의 종아리뿐이었습니다.

선생님이시기 전에 처음 본 도시 청년의 종아리는 나에게는 또 다른 충격이었습니다. 남자 피부가 어떻게나 뽀얗고 반짝이는지….
  ’선생님! 손님 가십니다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사(지금의 방호원) 아저씨의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은 울고만 있는 우리들을 향해 무릎 꿇고 반성하라고 지시하시고는 손님을 배웅하러 가셨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뒤 우리는 선생님을 부모님 이상으로 따르고 믿게 되었습니다. 방학이고 시골이라 집안에 도울 일도 많았지만 부모님들의 허락 하에 교실에서 잠을 자고 선생님 집(학교 사택)에서 밥을 해 먹으며 합숙 훈련도 하였습니다. 나에게는 모든 것이 첫 경험이었습니다. 합숙훈련도, 친구들과 밥을 같이 해 먹는 것도, 집을 떠나 학교에서 잠을 자는 것도 모두 처음이었습니다.

훈련에 지쳐있던 여름 밤, 선생님께서 우리를 모으시더니 갑자기 수박 서리를 가자고 하셨습니다. 목적지는 강 너머에 있는 수박밭이었고 한 개 이상을 따오지 못하면 오지 말 것이며 집합 장소는 강물이 흐르다 고여 있는 늪이라는 지시만 하시고 출발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옷을 홀딱 벗고 몸에는 진흙을 발랐습니다. 옷을 홀딱 벗는 이유는 주인에게 들켜도 진흙을 발라서 미끄럽고 홀딱 벗었기 때문에 잡힐 염려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검은 진흙색이 밤에 보호색 역할을 해 주기 때문에 더욱 안전하다는 생각에서입니다. 며칠 전에 이웃동네에서 수박서리 사건으로 우리 동네까지 시끄러웠던지라 겁이 더 많이 났습니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며 수박밭에 접근하여 큰 수박을 고르는데
  ’거기 뭐야!‘
  ’도둑이야!‘
  큰 소리와 함께 원두막에서 주인이 급하게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우리는 주인도 무섭고, 수박을 꼭 따서 오라고 지시하신 선생님도 무서워서 어떻게 할까 고민하며 납작 엎드려 있다가 이왕 여기 까지 온 목표는 하고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제일 큰 수박을 하나 따서 내달렸습니다. 혼자 들기에는 힘겨울 정도로 큰 수박이었습니다.

주인은 큰소리로 도둑을 외치며 이리 저리 우리들을 찾고 있었고, 우리들은 주인을 피해 이리로 저리 달리며 수박을 고르고 따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한참을 혼란 속에 달리고 달려 약속된 장소에 왔을 때는 모두가 커다란 수박 한 덩이씩을 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한 것이 뿌듯하여 도둑질한 것도 잊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서리를 해도 그냥 용서해주는 경우가 많았지만 어쩌다 잘 못 잡히면 경을 치고서야 해결되는 수도 있었습니다.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 때쯤에,
  ’원래 수박은 물속에서 먹는 거야!‘
  ’위로는 먹고, 아래로는 싸면서 말이야….‘
  선생님의 농담 섞인 말씀에 우리는 용기를 얻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박을 깨뜨려 먹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말씀대로 물속에서 먹는 수박은 또 별미였습니다.

진짜로 밖에서 먹을 때보다 더 많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참을 먹고 있는데
  ’이 놈의 도둑들이 모두 여기 다 모였군! 이놈들 잡아라!‘
  우리는 너무나 놀라 얼굴들이 새하얗게 변해 선생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전개될 일에 걱정을 하면서…,
  ’선생님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 녀석들이 얼마나 빠른지 한 녀석도 잡지를 못했네요.‘
  알고 보니 선생님은 낮에 벌써 수박밭 주인과 합의를 하고 돈을 계약을 마치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즐겁게 훈련도 시키고, 잊지 못할 경험도 갖게 해 주시기 위해 허락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수박서리를 시키셨던 것입니다. 주인에게는 어떻게든 한 녀석이라도 잡으라고 부탁하고, 우리에겐 어떻게든 한 개 이상 따서 목적지까지 오라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처음 경험해 본 일들이 선생님과 지냈던 짧은 1년 동안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해 가을에 개최 된 군내 핸드볼 학교 대항에서는 처음 출전한 시골 촌뜨기 우리 학교가 당당히 우승을 하여 읍내 학교를 누른 자랑스러운 이야기가  동네 사람들 입에 회자되기도 했고 학교 벽에 큼직하게 전시도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식구들과 당시 선생님의 추억을 더듬으며 찾아 간 학교는 폐교가 되어 운동장에는 어른 키만큼이나 자란 담뱃잎들만이 누군지도 모르는 나를 향해 어지럽게 인사를 해 대고 있었습니다. 크게만 보이던 운동장이 손바닥만큼이나 작게 보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며 선생님의 흔적을 찾지도 못하고 아쉽고 안타까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1980년대 초 내가 선생님 되어 대도시 학교에 발령이 났습니다. 아이들과 스카우트 활동을 하면서 뒤뜰 야영도 하고, 시골 학교를 빌려 1주일씩 야영도 했습니다. 어릴 적 나의 선생님 흉내를 냈고 아이들은 너무 행복해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때는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는지 어떻게 그런 행사를 할 수 있었는지 끔찍하기까지 합니다. 사방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 요서, 주변의 입방아, 헛소문…. 참으로 겁이 없었고 허세만 용솟음 쳤던 젊은 시절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참으로 많이 했었던 같습니다. 물론 어릴 때 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경험했던 비법들이었지만….

미리 계약하고 아이들을 속이며 즐겼던 수박서리도 스릴이 있어 좋았고 특히 귀신놀이는 아이들이 제일 좋아하던 코스였습니다. 각기 다른 지시가 쓰여 있는 열 개 정도의 메시지를 10여 미터 마다 숨겨놓고 과업이 끝날 때쯤에 교사들이 아이들을 놀라게 하는 놀이입니다. 보통 묘지가 있는 낮은 산을 선택하여 밤늦게 아이들을 서너 명씩 짝 지어 10분 정도 간격을 두고 출발을 시킵니다.

밤낚시용 캐미 등 요즘은 좋은 재료들이 많아 그것을 나무에 달아놓으면 아이들이 길을 찾아가기도 쉽고 색깔이 묘하게 으스스한 느낌을 주어 효과 만점입니다. 두 개의 캐미가 달려있는 곳에는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리면 메시지를 찾느라 아이들이 정신이 없습니다. 힘겹게 찾은 메시지 과업을 달성하고 안심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할 때쯤 교사들이 곳곳에서 아이들을 놀라게 합니다.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코너를 소개하면 ’가로 세로 1샌티미터 되는  작은 돌을 찾아 바위 뒤로 던져보세요‘ 라는 과업이 있었습니다.

그 바위 뒤에는 교사가 숨어 있다가 돌이 날아오는 것을 신호로 아이들에게 물을 뿌리는 등 놀라게 해 주는 코너입니다. 그런데 말 안 듣는 문제아 한 명이 거의 1미터나 되는 돌을 들어 바위 뒤로 던지는 바람에 그 돌덩이에 맞은 교사가 병원으로 직행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내가 화장실 귀신을 하고 있었는데, ’세 번째 화장실 문을 열어보세요‘라는 메시지가 있었고 세 번째 화장실 문을 열면 두 번째 화장실에 숨어있던 내가 아이들을 놀리는 코너였습니다. 역시 말 안 듣던 어떤 아이가 두 번째 문을 확 여는 바람에 나도 놀라고 저도 놀랐는데 갑자기 내가 정신이 혼미해져 쓰러졌습니다. 알고 보니 이 녀석이 스프레이 모기약(F킬라)를 가지고 왔다가 놀라면서 내 입다가 그 한통을 다 뿌려버려서 숨이 막혀 쓰러졌던 것입니다.

또 한 번은 학교 뒤뜰에서 야영을 하면서 인근 조그마한 산 정상까지 2, 3명씩 짝을 지어 야간 행군을 하고 오는 코너를 기획했습니다. 선생님들은 무서운 분장을 하고 중간 중간에 숨어 있다가 학생들을 놀라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여학생들이 너무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울고, 놀라는 바람에 산 너머에 있던 작은 신축 아파트 주민이 산 속에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경찰에 신고를 해 버렸습니다.

아이들이 거의 내려오고 교사들이 짐 정리를 하며 내려올 무렵 갑자기 산으로 순찰차들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네 방향에서 산을 포위하고는
  ’너희들은 포위되었다. 손들고 나와라!‘
  ’반복한다. 너희들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손들고 나와라!‘
  당황한 선생님들은 놀라기도 하고 겁도 나서 나오라는 말에 응하지 않고 오히려 몸을 낮춰 숨었습니다. 잠시 뒤 갑자기 사방에서 서치라이트가 쏘아지면서 어디서 몰려왔는지 수 십 명의 경찰들이 산을 수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숨어 있던 선생님 4명이 모두 잡혀서 경찰서로 연행되었습니다. 나중에 조사받고, 사유서 쓰고, 각서 쓰고, 엄청 힘든 과정을 거친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사전에 경찰서와 구청에 신고를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아서 민원에 따라  경찰들이 출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 나의 선생님처럼 나도 한 때 돈키호테 같은 선생님으로 아이들과 겁 없이 많이도 어울렸었습니다. 지금 하라면 도저히 자신이 없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그 어떤 선생님들도 그런 일은 벌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다 뜻하는 바가 있어 교직을 사직하고 다른 길을 모색했었습니다.

의지가 약했는지, 생활고를 이겨내지 못하고 좌절했는지 나는 다시 사립학교 교사가 되었고, 어릴 적 우리 선생님이 자신을 종아리를 치라는 꾸중을 하시던 생각에 지금의 우리 반 아이들도 그 때의 나와 같을 것이라고 믿고 흉내를 냈다가 정말 아프게 엄청 얻어맞고 말았습니다. 시대가 변했음을 깨닫지 못했고, 교육이 무너졌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스승이 사라졌음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맞은 종아리의 아픔만큼 가슴도 아팠습니다.
  선생님, 나의 선생님!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진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오늘도 옛 제자들을 또 올려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