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우 수필] 비밀의 방, 선생님 나의선생님1⑦

이훈우 2020-05-12 (화) 16:36 3년전 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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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우/ 일본동경한국학교 교감
한글세계화운동연합 일본본부장

며칠 있으면 스승의 날입니다. 한국에만 있는 의미 있는 기념일이라고 생각됩니다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요즘은 스승이라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남 앞에서 신분을 밝히기 조차 어색할 정도가 되어 버린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세상의 변화라고 스스로 인정도 해 보지만 조금은 슬프고 씁쓸합니다.

요즈음은 아무 곳에나 ‘님’자를 붙이고, 누구나 쉽게 ‘선생님’으로 불리어지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원래 ‘님’자는 임금, 부모, 스승에게만 붙여지던 극존칭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저 아무나 ‘--님, @@님’입니다. 그리고 스승님의 또 다른 표현으로 선생님이라는 용어가 사용됨을 잘 알고 있을 텐데도 아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도 ‘---선생님’,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합니다. 존경의 의미야 시대와 세상을 뛰어넘어 좋은 일이겠지만 스승의 날을 맞이하는 선생으로서 조금은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나의 자존심 때문일까요?

스승의 날이면 지금까지 빠짐없이 연락을 해 오는 제자가 두 명 있습니다. 한 아이는 여학생인데 지금은 의사가 되어 미국 ’보스톤‘에 살고 있습니다. 교사 시절에 내가 그 아이에게 해 준 것보다 그 아이가 나에게 해 준 것이 더 많았던 제자였습니다. 6학년 때 아버지를 갑자기 잃고 나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떠 올리며 의지하고 있는 제자입니다. 또 한 제자는 병을 앓고 있는 남자 아이입니다. 내가 많이도 힘들어 했던 아이였는데 지금은 병을 이겨내고 장가까지 가서 신혼여행을 일본의 우리 집으로 왔었던 아이입니다.

6학년 때 본인의 잘못도 아닌 일로 나에게 손바닥을 맞았고 맞아본 경험이 없었던 터라 많이 서운하고 당황했었는데 성인이 되고 그 이유를 알았다고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고 스승의 날이면 연락을 해 오는 제자입니다. 지금은 독일에서 ’친환경 의자‘ 제작으로 성공하여 남부럽지 않게 지내고 있습니다. 씁쓸함 속에서도 이런 아이들(지금은 두 아이 모두 40대가 되었지만) 때문에 크지는 나름 작은 미소 정도는 지을 수가 있는 것 같습니다.  

88올림픽으로 전국이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있을 때 난 교사로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별로 인기가 없었지만 1983년 대도시 최고의 학구 초등학교에 교사로 발령이 나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개인적으로 뜻하는 바가 있어 공무원의 신분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원하던 대학에도 새로 들어갔고 하고 싶었던 그림도 다시 그리며  어릴 적 꿈을 이루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역시 먹고 사는 문제는 쉽지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혼자 학비를 벌어가며 생활해야 했던 어려운 환경 속에서 노력과 용기만으로 꿈을 이루어간다 것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참으로 힘들고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느끼며 좌절의 시간을 보낼 무렵, 수녀님과 인연이 닿아 수녀원에서 다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원장수녀님의 추천으로 내가 버렸던 교직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꽤 유명한 사립학교에서 근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사각 그랜저 정도는 되어야 등하교 시간에 교문 앞에서 아이를 기다릴 수 있는 대한민국 내에 있지만 다른 나라의 학교와 같은 별세상이었습니다. 당시는 중학교에도 시험을 치고 들어가고 수석 입학을 시킨 학교와 학생의 이름이 중학교 교문에 높이 현수막(프랭카드)로 걸리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6학년이 되면 저녁 늦게 까지 보충 수업도 해야 했고, 매일 매일 시험 치고 반성하고 시험 치고 반성하는 1년을 보내야 하는 그런 6학년이었습니다. 교과서 진도는 1학기에 2학기까지 모두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연습연습 그리고 반복반복만이 계속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웃지 못 할 추억 한 가지는 봄 소풍을 갔는데 6학년 부장 선생님께서 시험지를 가지고 오셔서 점심 먹고 아이들에게 시험을 치게 하시곤 점수에 따라 상응하는 벌을 주고   그것도 모자라 돌아오는 길에는 틀린 문제의 답 찾기를 시키던 그런 6학년이었습니다. 그 덕에 시내의 2,30 군데 각 중학교의 교문에는 우리 학교 학생들이 수석이라는 이름으로 장식이 되었고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던 학교였습니다. 본인들은 못했지만 자식들을 통해 대리 만족을 하려고 아이들에게는 끝없이 투자하고 요구하며 행여 본인의 자식이 피해라도 받을까 학교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학부모들이 대부분이었던 그런 학교였습니다.

수업료로 운영되는 학교인지라 한 학급 40명 콩나물시루 교실은 당연했고, 한 학년은 두 학급이었습니다. 가르치는 것이 힘들어 도망을 갔었는데 젊고 실력 있다(나는 교육대학 입학 시 남자 중에서 수석입학을 했고, 졸업도 수석으로 했었습니다)는 이유로 가자 말자 6학년을 배정하는 것에 놀라고 당황하여 항의도 했었지만 당시 교장 선생님의 힘은 무소불위였습니다.

학교를 떠나기 전 가르치던 아이들도 학구가 좋은 곳이었던지라 아이들 얼굴들이 놀라울 정도로 부티가 나서 부러웠었는데 이 학교 아이들은 또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80년 대 한 때 무지개, 이슬 등 순수 한글 이름이 유행했었는데 내가 받아든 출석부에는 그런 이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어린이들이 성씨와 돌림자를 딴 정확한 두 자의 이름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었는데 여기 아이들은 모두  집안과 족보를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라네요. 족보 있는 아이들만 다닌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암튼 같은 하늘이었지만 다른 세상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서민 중에 서민으로 태어나고 자란 나로서는 적응이 잘 안 되는 학교와 학생들이었습니다. 열심히 가르쳤지만 내 노력이 부족했는지 아이들은 말도 안 듣고, 성적은 옆 반 보다 한참 뒤지고 문제가 쌓여만 갔습니다. 시중의 학습지는 학원에서 이미 다 푼 어린이들인지라, 매일 매일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서 가리방에 올려놓고 원지를 긁어 등사기에 일일이 한 장 한 장씩 밀어서 인쇄하여 아이들이게 시험지를 제공해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가 않았습니다(가리방은 가로 세로 촘촘하게 줄이 그어진 철판인데 그 위에 양초를 먹인 기름종이를 대고 뾰족한 철필로 글씨를 써 새기는 것입니다.

글씨를 모두 새긴 후에는 구멍이 숭숭 뚫린 질이 낮은 누런 갱지를 놓고 글씨가 새겨진 기름종이 위에 검정색의 잉크를 묻혀 동그란 롤러를 굴려서 한 장 씩 문서를 찍어내는 인쇄술인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여간 더디고 힘든 작업이 아닙니다.) 하루를 25시간으로 살아도 좌절만 맛봐야 하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믿음과 사랑으로 이어지고 의미 있는 교육의 장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점수와 결과만 있는 전쟁터였습니다.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스승의 날인 오늘 아침에도 아이들은 점수 이야기만 하고, 옆 반과 비교만 해 댑니다. 우리 반은 금년에 망쳤다는 둥, 운 없게도 실력 없는 선생님을 잘 못 만났다는 둥…. 스승의 날에 제자들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들으니 아무리 남에게 싫은 소리 하지 못하는 나로서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두 눈을 부릅뜨고 아이들을 노려보는데 한 아이의 눈동자가 내 눈으로 들어왔습니다. 누구나 이름을 대면 알 수 있을 고위공직자인 아버지가 며칠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서 슬픔에 잠겨있는 우리 반에서 두 번째로 키 작은 여학생입니다.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나에게 연락을 해 주는 바로 그 제자입니다. 

나를 말리는 눈빛, 참으라는 눈빛…. 망설여졌습니다. 참아야 하나…. 쉼 호흡을 여러 번 하고 마음을 진정시켰지만 이대로는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반장! 앞으로 나와!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너희들을 지금까지 잘 못 가르친 것 같다. 내가 책임지겠다.’

나는 교실에서 몽둥이를 찾아 반장에게 주며, 바지를 무릎까지 올리고
‘내가 잘 못했으니 내가 너희들에게 맞겠다. 반장, 때려라!’
내가 6학년 어릴 적에 전교어린이 회장으로서 아이들을 인솔하여 야외 학습을 지시 받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오후 3시까지 돌아오라는 선생님의 지시를 어기고 중간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5시가 넘어 아이들을 인솔하여 학교에 도착했더니 화가 나신 선생님께서 ’내가 너희들을 잘 못 가르쳤구나! 내가 벌을 받겠다. 전교 회장, 나를 때려라!‘ 선생님의 뽀얀 종아리를 보면서 눈물만 흘리던 내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랐습니다. 그 뒤 우리는 선생님께 진심으로 사과드리고 멋진 6학년을 마무리했던 잊지 못할 추억이 있었습니다. 지금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이 아이들의 양심을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내가 잠시 어릴 적 추억에 잠기며 이 아이들의 용서를 진심으로 바라며 기도할 무렵, ’쩔썩!‘ 소리와 함께 내 종아리로 몽둥이가 날아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 놀라고 당황했지만 내가 지시하고 내가 정한 터라,
  ’더 때려! 더!‘
  나는 결국 7대나 되는 몽둥이찜질을 반장에게 당했습니다. 내가 울고만 있었던 6학년 때의 나의 모습과는 달리 반장은 울지도 않습니다. 그냥 덤덤하게 나를 때리고는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뒷모습을 보면서 배신감도 느껴졌지만 저 아이의 모습이 우리 반 아이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겠다고 생각하니 배신감보다는 허탈하고 슬픈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되었지.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조용한 적막 속에 나를 눈빛으로 만류하던 여학생의 작은 어깨 떨림과 함께 조그마한 흐느낌만이 교실에 흐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종례를 했는지 어떻게 마무리를 했는지 기억도 없습니다. 

다음날 이 대로 지나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보충수업이 시작되었을 때 난 아이들 앞에서 걸상을 높이 들고 교탁 앞에 섰습니다. 보충학습을 준비하던 아이들은 놀랐지만 나를 말리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너희들을 아무래도 잘 못 가르친 것 같다.‘
  ’너희들이 무슨 죄가 있겠니?‘
  ’내가 대신 벌을 서겠다.‘
  한 참의 웅성거림이 있는 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교실은 다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10분, 20분, 30분…. 내 이마에선 비 오듯 땀이 흐르고 목덜미에는 굵은 핏줄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중간에서 그만 둘 수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그만 두면 인생에서 패배자가 될 것만 같았습니다. 정신까지 혼미해졌지만 이를 악물로 버티고 참았습니다. 아이들도 다시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금방 그만 둘 줄 알았던 선생님이 30분이 지나고서도 저렇게 벌을 서고 계시니 아이들도 겁이 나기 시작했나 봅니다. 다시 5분 정도가 더 흘렀습니다. 나도 이젠 한계까지 와서 더 이상은 비틸 힘이 없었습니다. 눈도 충혈이 되어 핏줄이 터질 지경이었습니다.
  ’선생님! 잘 못 했습니다.‘
  어제부터 나를 말리던 키 작은 여자 아이가 달려와 제 팔 위의 걸상을 내리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손이 닿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습니다.

웅성거림과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졌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반장이 나와서 내 손에 떨어지다시피 걸려 있는 걸상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잘 못 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비는 반장을 일으켜 세우다가 나는 정신을 잃었습니다.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땐 늦은 밤이었고 반장 아버지가 운영하던 병원이었는데 우리 반 아이들 모두가 내 병실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뒤, 우리 반은 자유가 넘치는 반이 되었습니다. 서로의 어려움을 감추는 것이 아니고 터놓고 도움을 요청하고, 진심으로 도왔습니다. 수학여행도 갈 수 있었고, 가을 소풍 때는 시험을 치지도 않았습니다. 체육시간에는 운동장에서 축구도 즐기는 지금까지는 생각지도 못할 6학년이 되었습니다. 6개월이 지난 뒤 우리 반 반장은 최고의 성적으로 중학교에 들어갔고, 30 여 개의 시내 중학교 교문에는 우리 반 아이들이 수석이라는 이름으로 장식을 하였습니다. 40 명의 학생 전원이 졸업 여행으로 강원도 바닷가 팬션을 통째로 빌려서 밤을 지새우며 서로의 우정과 헤어짐의 아쉬움을 달랬던 녀석들입니다.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겠지만 좀 더 나이가 들면 나를 꼭 찾을 거라고 믿고 있는 잊을 수 없는 사립학교에서의 첫 제자들입니다.

나는 그 뒤 몇 년을 더 돈키호테처럼 근무를 하다가 내가 있어서는 안 되는 세상이라고 판단하고 두 번째 사직을 했습니다.
(선생님, 나의 선생님Ⅱ)에서는 나에게 종아리를 내 미시던 우리 선생님에 대해 써 보고자 합니다. 기대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