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우 수필] 비밀의 방, 광견병 공수병⑤

이훈우 2020-05-07 (목) 09:52 3년전 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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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훈우/ 일본동경한국학교 교감, 한글세계화운동연합 일본본부장

 

1970년에 나는 5학년이었습니다. 5월이 되면 학교에서는 채변검사를 합니다. 당시는 아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배 속에 각종 기생충들을 많이 키우면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작고 메말랐으나 배만 볼록한 체형의 아이들이 많았는데 십중팔구는 몸속에 많은 기생충들을 키우고 있는 경우입니다. 때로는 이 기생충들이 서로 엉켜서 딱딱한 실 뭉치처럼 되어 심한 복통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어머니 손이 약손이었을 무렵 어머니의 부드러운 쓰다듬음으로 인해 이 기생충들이 서로 실타래처럼 엉켰던 꽈리를 풀어서 배가 안 아프게 된 건 아니었던 가 혼자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집에서 먹는 배추, 무 등을 텃밭에서 거름으로 키우는 경우가 많았고 생으로 채집하여 먹었기 때문에 기생충들이 많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회충이었던 같습니다. 회충 외에도 편충, 촌충, 십이자장충 등 지금은 들어도 알지도 못하는 여러 종류의 기생충들을 몸속에 많이도 넣고 함께 살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한 알의 약으로 1년 동안 처리가 되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지만 말입니다.

 

그 많은 몸속의 기생충들을 처리하기 위해 나라에서는 전국적으로 봄과 가을에 두 번씩 학생들을 검사하여 약을 제공하곤 했었습니다. 각자에게 채변봉투를 나누어주고 다음날까지 채변을 해서 학교로 가지고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우리들은 모두들 있는 데로 인상을 쓰곤 했었답니다. 당시는 화장실이 모두 푸세식(재래식)이라 채변을 하기가 불편했고, 채변봉투라는 것이 너무 얇고 질이 떨어져서 자칫하면 뚫어져 내용물이 새어나오기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힘겨운 노력 끝에 성공을 해도 풀(접착제)도 없는 그 당시에 그것을 냄새가 나지 않게 꼭꼭 갈무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는 풀이나 종이, 봉투 등이 귀했기 때문에 밥알로 얇은 채변봉투를 어설프게 접착을 하고 필통 속에 소중히 넣어서 학교에 가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책보자기(당시의 가방)에 도시락과 책, 필통을 함께 넣고 둘둘 말아서 허리에 둘러메고 학교에 도착해 보면 십중팔구는 채변봉투의 내용물이 밖으로 나와서 연필과 책들을 모두 더럽혀 놓곤 했습니다. 냄새는 또 얼마나 지독한지. 당시에 채변검사는 쥐꼬리 끊어 제출하기와 함께 전교생 모두가 정말 싫어하는 행사 중의 하나였었습니다.

 

5학년 이맘 때 쯤의 일입니다. 채변봉투를 학교에 가지고 가는 날이었는데, 나는 그만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호랑이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계속 어른거렸지만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벌써 집을 떠나 학교에 거의 도착한 시점이었으니까요. 학교에 도착하니 커다란 비닐봉지가 교실 입구에 걸려있고 그 속에 각자의 채변봉투를 넣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아침부터 냄새가 온 교실에 진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은, 나를 포함해 채변봉투를 가지고 오지 않은 몇 명 덕분에 3교시 마칠 때까지 모두가 대변 냄새를 맡으며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왜냐면 호랑이 선생님께서 가지고 오지 않은 학생들에게 오전 중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채변봉투를 제출하라고 아이들을 밖으로 몰아낸 까닭입니다.

 

아이들이 돌아올 때까지 커다란 채변봉지는 교실 입구에 걸려 있었던 것입니다. 나도 몇 명의 아이들과 함께 새로 얻은 채변봉투를 들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친구들은 학교 화장실, 뒤뜰, 실습장 등을 돌아다니며 목표를 달성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었고, 그 모습을 교실 안에서는 유리창 너머로 처다 보면서 키득키득 배꼽을 잡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나는 도저히 채변을 할 수가 없어 여기 저기 굴러다니는 개똥을 집어넣어 제출하고 교실로 들어갔었습니다.

 

요즘 같았으면 이지매니, 인권무시니, 갑질이니 등으로 시끄러웠겠지만 당시는 선생님이 왕이요, 법이었습니다. 학생들 뿐 아니라 부모님도 어느 한 사람 선생님에 대항하지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개똥을 낸 저는 더 이상의 선생님의 확인이 없었기에 안심을 했었습니다만 뒤에 일어날 일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죄를 짓고 살면 언젠가는 벌을 받는 가 봅니다.

 

보통 보름쯤이 지나면 채변 검사 결과가 나옵니다. 당시 우리 반은 38명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기생충을 뱃속에 키우고 있지 않는 학생은 아마도 한두 명 뿐이었을 겁니다. 오늘은 채변검사 결과가 나온 날로, 선생님은 결과서를 손에 들고 1번부터 이름을 불러가며 기생충 약을 주십니다. 그 때는 약이 좋지 않아서인지 정말 많이 줍니다. 결과서에 적힌 대로 학생마다 그 양을 다르게 주는데 어떤 아이는 한 웅큼의 약을 받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시골에서 약 먹는 것이 익숙하지 못한 아이들인지라 선생님께서 직접 약을 입에 넣어주시고 물을 먹여주십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주시는 약을 넘기는데 애를 먹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약을 먹다가 토하는 아이, 먹지 못하겠다고 떼쓰다가 엄청 터지는 아이, 그냥 하염없이 약만 바라보며 울고만 있는 아이, 심지어는 기다리다 화가 나신 선생님께서 강제로 입안에 약을 밀어 넣고 물을 마구 부어대던 아이도 있었습니다. 약을 먹고 나면 아이들은 약에 취해 보통 엎드려 있습니다. 눈동자가 풀리는 아이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뱃속에 기생충이 많아서 요동을 치는 바람에 복통을 호소하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요즘처럼 한 알만 먹으면 모든 기생충들이 죽어서 녹아버리는 약효 좋은 약이 아니었던 지라 약과 기생충이 배 속에서 전쟁을 하기가 일쑤였습니다. 어떤 때는 입속에서 15센티 정도의 하얀색 회충이 약 기운을 견디다 못해 거꾸로 기어 나오는 때도 있어 아이들이 기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놀리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언제 자신의 모습이 될는지 모르는 상황임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충약을 먹은 날의 숙제는 어김없이 회충 몇 마리가 나왔는지 적어오기였습니다. 4

 

드디어 36번 내가 약을 타서 먹을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심상치가 않습니다. 조용히 앞으로 나를 부르신 것 까지는 좋았는데 앞에 나가니 선생님께서 무작정 몽둥이찜질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유도 모르도 한참을 맞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야 이놈아! 네가 개냐?”

하시며 결과지를 내 눈앞에 내밀며 흔드셨습니다. 눈물 어린 눈으로 바라다 본 결과지에는

광견병(공수병) 의심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미친 개똥을 담아갔었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