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우,기록여행 6] 나의 영국 연수기

관리자 2020-01-25 (토) 11:34 4년전 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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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우/동경한국학교 교감, 한글세계화운동연합 일본 본부장

 

그럭저럭 3개월의 연수가 지난 어느 날, 낯설었던 영국 생활에 대한 두려움도 없어지고 조금은 연수생들이나 동네 현지인들과도 익숙해질 무렵, 뜻이 맞는 연수생들 5명이 모여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성을 중심으로 영국 북쪽 지방을 여행하기로 했다.

 

마침 에든버러 지역에서 개최되는 축제와 함께 성 안에서 공연되는 타투라는 군대 행진 공연이 우리들의 관심을 끌었다. 우리는 서로의 역할을 나누어 회비를 모으고, 숙소를 예약하고, 여행 코스를 정하며 기대에 들떠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일주일을 지냈다. 새로운 세상을 접하는 가슴 떨림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란 것을 세삼 느꼈다.

 

들뜬 마음으로 준비를 마친 금요일 오후 우리는 런던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1시간을 조금 넘게 달려 유스턴역에 도착하여 ‘MEAL DEAL’에서 3파운드(4,500)에 샌드위치, 음료, 스낵간식을 한아름 받아서 황급히 글래스고행 열차에 다시 올랐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 느낌으로 열차 안에서 노래도 부르고, 게임도 즐기면서 우리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달리고 달리며 여행을 만끽했다.

 

너무 큰 소란이 아니면 모른 체 해 주는 것이 영국문화인지는 모르지만, 주변의 승객들 중 누구 한 사람 입을 대는 사람이 없었기에 우리는 여행에 들떠 주변 상황에 여의치 않고 기분을 냈던 것 같다. 목적지를 1시간 정도 남겨놓은 무렵, 급하게 실내 방송이 나왔다. ‘기차에 문제가 생겨 잠시 정차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거 선진국의 기차 시스템 맞나? 영국이 이러나?’라는 의아심 속에 주변을 살폈는데, 놀라울 정도로 주변 사람들은 아무 동요 없이 그저 그러려니 하는 얼굴이었다.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나나 보다.’라는 판단 아래 그냥 그렇게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런데 10, 20, 1시간, 1시간 30분이 지나도 기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급기야 옆자리 아가씨 한 명이 곤란한 얼굴로 소리 없이 눈물을 글썽였고,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옆에서 조용히 다독거려 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은 별다른 동요를 일으키지 않았다. 참으로 참을성이 대단한 민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십분만 착오가 생겨도 환불까지 요구하며 소동을 벌이는 한국과는 너무 다른 모습에 의아한 느낌마저 들었다. 사람들은 상황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말없이 기다리기만 했다. 30분쯤이 더 지나고서야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개인별로 많은 급한 사정들이 있을 법도 한데 누구 하나 항의하는 사람이 없었다. 민족성인지, 시민의식인지 아니면 자주 일어나는 사고라 그냥 습관화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신기하기까지 했다.

 

목적지 에든버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서 숙소 체크인을 할 시간이 없었다. 황급히 이동하여 겨우 행사 시작 시간에 맞춰 에든버러 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국토 면적으로만 따지면 그리 크지 않은 나라지만 예전부터 영국에는 크고 작은 영주들이 각각의 모습으로 각각의 규칙을 만들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영연방으로 통일이 되면서 각 영주들의 군대들이 영국 왕실을 하루씩 경비하고 해가 뜰 때쯤 교대를 했다고 한다. 지금 버킹검 궁 군대 교대식은 세계적 관광 거리로 세계인들이 한 번은 보고 싶어 하는 행사가 되어 관광산업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현재도 이런 군대들의 모습을 잘 살려 각 지역(영주)의 전통 군인들이 한 곳(버킹검 궁)에 모여서 타투라는 행사로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을 구름처럼 모으고 있다. 사회자가 각 나라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함성을 질러댔다. 대한한국의 이름을 불려졌을 때, 20명 정도 크기의 함성이 들려와서 너무 반가웠었다.

 

평소 군대 행진을 너무 좋아하던 터라 나는 남들보다 흥이 더했다. 행진곡에 맞춰 행군하는 씩씩한 군인들의 모습, 가상 전쟁, 각 종 대포소리와 총소리, 다양한 전통 악기로 연주하는 군대 행진곡, 감칠맛 나는 사회자의 넉살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함성을 질러대며 즐기다보니 어느덧 마지막을 달리고 있었다. ‘나이아가라폭포를 주제로 한 환상적인 마지막 불꽃축제는 지금도 잊을 수 없이 가슴 떨리는 감동으로 남아 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가슴 찡한 경험이었다.

 

숙소로 가는 길에 기차역에서 쭈그려 잠을 청하고 있는 동양인을 만났다. 너무 위험해보이고, 안쓰러워보여서 몇 마디 말을 건넸더니 우리 동네 대학의 학생이었다. 당시는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럽 배낭여행이 유행이었다. 이 학생도 배낭여행을 왔는데 여비를 아끼기 위해서 역에서 잠을 잔다고 했다. 참 마음이 아팠다.

 

마침 우리는 5명이 방 3개를 예약한 터라, 괜찮다면 같이 가자고 했고, 본인도 역에서의 잠자리가 불편했던지 따라나섰다. 숙소에 도착한 시간이 11시였다. 한국의 민박 형태의 숙소였다. 문이 잠겨 있어서 두드렸더니 주인이 나와서는 반겨주기는커녕 화부터 냈다. 계약에 10시까지 체크인을 해야 한다고 적혀있는데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기차가 연착되어 그렇게 되었다고 해도 화가 덜 풀렸는지 표정이 좋아지지가 않았다.

 

근데 5명이 예약했는데 왜 6명이냐고 질문을 해 왔다. 여차저차 해서 중간에서 1명이 더 합류했다고 하니까,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면서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아무리 부탁을 하고, 설명을 해도 영어가 짧아서인지 안 된다는 것이다. 돈을 더 준다고 해도 절대로 안 된다고 했다. 계산법도 한국과는 달랐다. 방의 수를 기준으로 가격이 책정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 수로 계산을 한다고 했다(가만히 보면 영국과 일본이 매우 닮아 있었다.

 

아마도 일본이 개화하면서 행정시스템은 독일에서, 그 외는 영국에서 본을 따 온 것으로 보여 진다.) 1시간 정도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그 집에서 잠을 자지 못하고 함께 노숙을 했다. 같이 가자고 한 의리가 있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잊었던 고향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며 이국땅 낯선 거리에서 처음 만난 청년과 같이 아침을 맞았다. 숙소에 지불한 돈이 아까워 아침밥은 숙소에서 챙겨 먹었다.

 

나름대로 신경 써서 내어 온 아침밥을 먹으면서 밤새 움츠려졌던 몸도 추스르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기분이 새로워졌다. 체크아웃을 하면서는 최대의 예의를 갖추었지만 전날 밤의 일들이 불쾌했던지 계속 얼굴 표정을 풀지 않았다. 뒤끝이 상당히 있는 주인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이후에도 한국 손님은 환영하지 않았다니 놀라고 당황한 느낌이 들었다.

 

조금은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지만, 손님을 내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결론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니 조금은 죄책감이 들었다. 한 번 더 그 집을 찾아서 정중히 사과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는데, 어쩌다보니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찾아가질 못했다. 아직도 그 집은 한국 손님은 받지 않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