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 읽는 평론] 김기택/ 봄날

오양심 2019-04-22 (월) 01:54 5년전 2684  


3713395f4999735e9fb30672b248422c_1555865640_5921.jpg
                       <김기택 시인>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햇볕을 쪼이고 있다

굵은 주름 가는 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햇볕을 채워 넣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

온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고 있다

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

잘만 하면 한순간 뽀오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할머니들은 마음을 저수지마냥 넓게 벌려

한 철 폭우처럼 쏟아지는 빛을 양껏 받는다

미처 몸에 스며들지 못한 빛이 흘러 넘쳐

할머니들 모두 눈부시다

아침부터 끈질기게 추근대던 봄볕에 못 이겨

나무마다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

할머니들은 사방으로 바삐 눈을 흘긴다

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다

오오 얼마 만에 환해져 보는가

일생에 이렇게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눈앞에는 햇빛이 종일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환한 빛에 한나절 한눈을 팔다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

할머니들은 가끔 눈을 비빈다

 

 

<오양심/시인, 건국대 통합논술 주임교수>

 

이 시의 곳곳에는 시인만이 가지는 신선한 사유들이 일상적이다. 시적 주인공은 할머니들이다. 아파트 앞에서 햇볕을 쪼이고 있는 모습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가 있다.

 

오랜 세월을 살아온 할머니를 소재로 일상적 풍경에 삶 전체를 투영시키고 있어 경이롭다.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시적 사유의 즐거움을 번개처럼 날카롭게 바다처럼 온유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시에서 가장 감동을 주는 대목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이다. 이 시의 메시지는 환한 날에 대한 경계와 인생무상이 중첩되어 있다. 모든 문학적 사유의 원천은 '시적 사유'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