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수 수필] 해원 꽃 머금은 순천낙안면 오금재

관리자 2019-04-18 (목) 18:24 5년전 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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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수/ 시인>

 

 

가슴속에 맺혔던 원통함을 푼다는 해원(解冤) 음악제가 열렸다. 하늘조차 구슬펐는지, 종일 비구름으로 휩싸인 채 낙안읍성 객사는 을씨년스러웠다. 여, 순사건 당시 양민들의 비통함을 말해주듯 날씨조차도 변덕스러웠다.

 

14일 오후 3시였다. 낙안읍성 객사에는 주민을 비롯한 많은 시민들 그리고 관광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1회 여, 순사건 해원음악제가 막을 올렸다.

 

“여, 순사건 슬픈 역사를 노래로 승화하다.”라는 주제로 열린 해원음악제는 여, 순사건의 피해가족을 위로함은 물론 특별법 제정의 필요성에 대한 범시민적공감대를 형성하는데 그 추진배경이 있다. 더욱이 이 지역의 큰 피해자인 낙안면 오금재 너머 9개 마을 양민학살유가족의 억울함과 아픔을 지역민이 함께 치유하고 이 행사를 계기로 순천전역을 넘어 동부지역, 그리고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기를 바라는 마음인 것이다.

 

조한규 여순사건영상기록위원회 이사장은 대회사를 통해 “실체적 진실은 역사의 뒤편에 묻힌 채 71년이 흘러왔습니다. 좌우 이념도 모른 채 무고하게 희생당한 1만 3천 영혼들은 지금도 구천에서 떠돌고 있습니다. 피맺힌 한을 품고서 해원의 날을 기다려 왔던 것입니다. 한의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해원의 문을 열어 새날을 밝혀야 합니다.”라고 역설했다.

 

또 허석 순천시장은 인사말을 통해 “우리지역의 여순10.19는 제주4.3항쟁과 쌍둥이입니다. 즉, 국가에 의해 양민학살사건입니다.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특별법안이 입안됐지만 국회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여순 10.19는 우리들에게 화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게 하고 동서와 남북, 좌우의 대립을 지양하고 상생과 공영으로 나아갈 것을 이야기합니다.”라고 가슴속에 남아있는 해원을 음악으로 널리 알리기를 호소했습니다.

 

이외에도 신길호 낙안면장과 김기태 도의원을 비롯해 서정진 순천시의장, 강형구 부의장, 장숙희 의원, 이명옥 의원, 농협조합장, 낙안이장협의회장, 여성농민회장, 농민회장, 채동선문화사업단장, 낙안읍성지원사업소장, 순천만요양병원장, 등 다수의 내빈들이 참석해 의미 있는 행사로 진행됐다.

 

무엇보다도 낙안면민을 대표한 신 면장의 부단한 노력은 이날 행사에서도 돋보였다. 그는 제1회 여,순사건 해원음악제를 치루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여, 순사건 영상기록위원인 김근철 씨와 함께 행사준비와 주민화합에 여념이 없었다. 그 결과 적은 예산으로 위령제 및 간담회는 물론 해원음악제를 간소하게나마 치룰 수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전국최초의 민간인 면장으로 면민들의 바램과 미래의 농촌 삶을 그려주는 활력소가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틈나는 시간을 활용해 35개 마을주민들을 만나서 낙안면중장기 마스터플랜을 설명하고 마을의 역사성과 미풍양속 등을 들었다. 그리고 10년 후의 마을미래를 생각하며 토론하는 시간들을 가졌었다. 게다가 신 면장은 그 역사성 속에 묻혀있는 오금재 너머 9개 마을 양민학살을 엿보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 14일이었다. 여순사건을 겪었던 김두홍 80대 노인을 만났다. 그는 여순사건 당시, 순천현장을 목격했던 사람으로 그날의 생생함을 그대로 진언했다. 순천의 관문인 장대다리 옆에서 살았다는 그는 10.19일 자신의 신체검사를 하기 위해 순천황금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던 중 요란한 총소리를 듣고 사건의 심각성을 알았다며 그날 이후의 사건들을 피력했다.

 

경찰과 반란군의 싸움으로 시내 곳곳은 붉은 피와 시체들로 아수라장이 됐으며, 지역민들은 공포에 떨었다고 했다. 낮에는 경찰병력이 판을 치고 밤에는 반란군들이 판을 치면서 애꿎은 양민들이 학살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좌익도 우익도 모르는 양민들로써 그저 무력 앞에 복종했을 뿐, 아무런 죄가 없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역에 참여했다는 이유만으로 이승만정권의 경찰병력은 집단학살을 감행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당시, 손가락총은 왜 그리 무서웠는지, 지금 생각해도 끔직한 사건현장 이었다며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특히 완장 찬 사람들은 무지에 가까운 사람들로써 자신의 비위에 거슬리는 이웃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학살당하게끔 했다는 것이다. 그는 지탄에 맞아 죽은 양민들만 해도 부지기수였다고 했다.

 

이처럼 여수, 순천의 양민들은 무모하게 희생당했었다. 그 특별법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현실에서 “제1회 여, 순사건 해원음악제”는 매우 뜻깊다 아니할 수 없다. 부디 합심하여 “해원 꽃”이 피도록 지역민은 물론 온 국민들의 성원이 있기를 바라고 있다.         

 

낙안 오금재 너머 9개 마을무참히 꺽여 버린 꽃송이들恨스런 그림자로 따르는 날解冤門 열어 재치고새날을 밝혀야 한다 아직은 머금은 해원 꽃햇빛 받아서샘물 뿌리고황토 덮으며활짝 핀 해원 꽃으로새하얀 새날에 피어야 한다

 

조용한 산골마을 토벌군 총칼 피하지 못한 넋저 오금재 너머 너머로고동산이 울고금전산도 울고 운다

양민의 혼맴돌고 맴도는 그곳낙안 오금재 너머 9개 마을골바람소리 구슬피 우는 곳까마귀도 따라 우는 그곳으로해원 꽃이 피어나는 그곳으로

 

(필자의 “해원 꽃 머금은 오금재”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