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영의 작가의 新 베트남 紀行(하편) 인도차이나반도의 숨겨진 보석, 베트남

김우영 2019-03-17 (일) 22:01 5년전 2302  

김우영의 작가의 新 베트남 紀行(하편) 인도차이나반도의 숨겨진 보석, 베트남

d3a7bc38830f42681943839bbcc2e7ad_1598868282_8438.jpg

2020.8.2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57657_051.jpg

 1. 내셔널지오그래픽 추천 완벽한 여행자가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원시적 비경 해운(海雲)고개의 파노라마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57910_36.jpg

 베트남의 주옥같은 문화유산의 보고(寶庫)인 후에시를 뒤로 하고 다낭시를 향했다. 다낭 까지는 버스로 약 3시간 걸린다고 한다. 베트남 중부권의 최대의 상업도시인 다낭을 가기 위해서 세계 내셔날지오 그래픽이 추천한 완벽한 여행자가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원시적 비경의 ‘해운(海運)고개’에 접어들었다.

 고개 초입부터 짙푸른 남중국해의 바다와 깍아지를 듯한 절벽과 풍요한 자연의 원시림은 아! 하고 감탄이 나왔다. 그야말로 세계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추천한 완벽한 여행자 한 번은 가봐야 할 빼어난 풍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꼬불꼬불한 해운고개에 들어서자 현지 가이드가 말한다.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59302_9697.jpg

 “이곳 베트남은 마치 양파껍질 같아요. 벗기면 벗길 수 록 알 수 없는 곳이 바로 베트남이예요. 마치 저기 고개 아래에 펼쳐진 구름처럼 아리송해요?”
 
 오른쪽 산등성이로는 끝없이 펼쳐진 산과 정글들 왼쪽으로는 남중국해의 푸른바다를 안고 휘감으며 얕으막하게 생긴 야자수림 사이로 조용한 어촌들이 언뜻언뜻 내려다 보여 ‘이곳도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이구나!’하고 생각이 들었다. 

 또 고개 중간쯤에 다다르자 무장한 군인들이 위협적인 표정으로 초소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 청룡부대 군인들과 이곳 베트콩들이 총 뿌리를 겨눈 채 싸웠던 월남전의 일들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듯 했다. 낡은 푸른색의 군복에 검으잡잡한 깡마른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는 모습은 섬뜩한 마음마져 든다. 월남 전쟁 당시 우리 국군 포로를 잡으면 사지를 찢어 나무에 걸쳐 놓았다는 무서운 생각이 이들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스쳤다.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59361_8115.jpg

 한참을 가다보니 랑고비치(Langco beach)라는 해변이 나왔다. 일행은 우르르 몰려나와 하이얗게 펼쳐진 백사장을 가로 질러 푸르런 남중국해 바닷가를 향하여 걸었다. 해변가까지 잡상인들의 상혼은 뻗쳐있었다. 월남전 당시 미군과 우리 국군들이 애용했다던 지프라이터와 빛바랜 우표첩 등 잡다한 것들을 바구니에 담아온 소녀과 아주머니들이 끈질기게 달라 붙는다. 푸른 해변을 뒤로하고 오르니 코코넛을 판다. 지난 밤 후에시에서 마셨던 술 탓이 있어 코코넛을 한 개 사서 그 안의 물을 마시니 참으로 달콤하며 시원하였다.
 
 그리고는 허리를 펴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남중국해의 넓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30여년 전 우리의 국군 청룡부대와 공병부대 십자성 부대 장병들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배를 타고 이곳 남중국해를 오갔다는 생각이  들자 아득한 옛날일로만 느껴졌다. 또 이곳 해변과 저만치 정글에 이르기까지 전후방이 없는 게릴라전인 월남전을 치루면서 죽어간 우리의 선배 국군들을 생각하니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964년 한국군 베트남 파병을 시작으로 1975년 사이공 함락으로 남베트남 정권이 붕괴되기까지 10여년동안 총40여만명 파병과 5천여명의 우리 국군이 전사하였다. 근간에 각종 국내외 언론에서 지적하는 것 처럼 과연 베트남에 대한 국군의 파병이 자유수호의 의지였는지? 아니면 단지 미국을 위한 용병이었는지? 또는 6.25전쟁으로 피폐해진 우리나라 경제를 재건하기 위한 구실이었는지? 이제 와서 전후(前後)평가(評價)라는 애매한 잣대로 재고 싶은 마음은 없다.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59472_4774.jpg

 다만, 우리들의 형님이자 아저씨 같은 선배들이 수 억 만 리 멀리 이국땅인 이곳 열사의 나라에서 따듯한 부모와 가족들을 뒤로하고 처연하게 죽어갔다는 사실이 가슴을 뭉클하게 메어지게 하고 있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긴 사이 일행은 태운 버스는 아슬아슬한 협곡의 고갯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아스라히 저 발 아래 펼쳐진 계곡 아래로 그야말로 해운(海雲)고개답게 바다구름이 손에 잡힐듯 운무(雲霧)를 형성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고개를 가는 사이 길 옆에 분수들이 물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것은 저 높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자연스럽게 호수에 연결하여 힘겹게 오가는 차량의 바퀴에 물을 뿌려 냉각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산중간에 우리의 시골집 뒷켠에 있는 장독대의 작은 신당 같은 것이 보여 물으니 저것은 어느 날 이 지점에서 차량이 굴러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망자(亡者)를 위로하는 한편 위험표시를 하기 위함이란다.

 발아래 낭떨어지로 자칫 구를 듯 또는 좁은 언덕길 소로를 따라 손에 땀을 쥐게 하듯 곡예운전을 하는 버스가 다다른 지점은 다낭시 못미쳐 ‘하이반 고개’였다. 이곳은 월남전 당시 우리국군의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해운고개가 끝날 무렵 저만치 송차반도로 둘러쌓인 천연항 다낭이 한 눈에 들어왔다. 후에시를 뒤로 하고 해운고개와 하이 반(바다와 구름의 뜻)고개를 힘겹게 달려 도착한 곳은 송차반도로 둘러쌓인 천연항구 다낭(Da Nang)항이다.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59517_8499.jpg 

 

 하얀 포말이 몰려오고 끝없는 진초록색의 남지나해를 끼고 야자수와 사탕수수나무가 백사장에 즐비한 아름다운 항구인 베트남 최대의 중부도시인 다낭. 옛 부터 동서무역의 중계지 역할을 했으며 중요한 국제 무역항으로써 번성했던 이곳은 12-15세기에 걸쳐 세력을 과시했던 참족의 나라인 찬파왕국의 왕도이기도 했다. 왕도는 다낭 시가지 근교인 차큐에 있었던 때도 있었는데 주변에는 미션(聖地)등 찬파의 각종 문화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다낭 시내에 들어서니 이곳 역시 많은 오토바이와 자전거 시클로 등이 무수히 도로를 지나고 있었고, 인도에는 삿갓모양의 롱가이를 쓴 많은 사람들이 얇은 대바구니에 파인애플과 바나나를 담아 어깨에 막대기를 메고 힘차게 길을 지나고 있었다. 또 간간히 런(삿갓)과 흰색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여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밝은 모습으로 아오자이 치마자락을 흔들며 지나고 있었다. 이곳의 학교교육 기본 학제는 우리와 같은 12년 코스이지만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각 각  5년 과정이고 고등학교 과정이 2년이다.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59563_5077.jpg

 다낭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베트남 전쟁 때 미군 최대의 공군기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1965년 미군은 이곳 첫 전투에서 쓰라린 패배를 맛본다. 당시 미군 공군기지는 현재 베트남군이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월맹군의 본거지였던 하노이를 수시로 맹폭(융단폭격)하는데 이곳 기지에서 전투기 300대가 동시에 이 착륙했다고 한다. 당시 하노이에 대한 미국의 북폭(北暴)의 피 어린 전쟁 잔해가 눈에 보이는듯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사용되었던 폭탄 투하량이 635천톤이고, 2차 대전 때는 2,057천이나, 베트남 전쟁에 무려 7,859천톤이나 폭탄이 투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융단폭격’이란 낱말도 베트남 전쟁 때도 나왔다고 한다. 월맹군은 본거지인 하노이를 출발 중부권과 사이공을 게릴리라식으로 침투했는데 이것을 일명 ‘호치민루트’라고 한다. 베트남 지형은 국도 1호선을 끼고 추옹송산맥(長山)이 길게 남북으로 이어져 있다. 밀림에 은거하다가 침투하는 베트콩을 섬멸하기 위해서 미군은 B52 전투기와 헬뮤어 헬리콥터로 무수한 융단폭격을 퍼부었다.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59600_1606.jpg

 이로 인해 전쟁 당사국인 베트남은 물론 큰 피해를 입었지만 하노이 인근의 라오스와 중부권 다낭과 퀴논을 끼고 있는 산악지대인 캄보디아가 본의 아니게 폭격의 영향권에 들어 많은 인명과 재산상의 손실을 입었다고 한다. 

 특히 이곳 다낭 호이안 북쪽의 디엔증은 우리 청룡부대가 1967년부터 다낭 외곽 방어를 위해 주둔했던 곳이다. 이곳엔 대민 봉사의 하나로 만들어 놓은 ‘살로 따이한도로’가 도로가 있다. 시내에 들어서자 시원하게 일자(-)로 쭈욱 뻗은 따이한로(남쥬딘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59661_1743.png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61335_2125.jpg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59661_4595.jpg 

 따이한로를 걸으며 그 유명한 신화속의 승리전투였던 ‘쨔빈동전투’가 떠올랐다. 1965년 11월 8일 1개월동안 벌인 이 전투는 번개 1, 2, 3호란 전투명의 작전이었다. 이로써 한국 청룡의 맹위 무적을 세계적으로 부각하는데 큰 몫을 했고, 이른바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귀신(베트콩)잡는 해병’이란 말이 이 전투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시내에서 어느 노인을 잡고 물었다. 공병부대인 십자성부대의 주둔지 아는지? 그러나 지금은 잡초 무성한 둑 아래에 롤러스케이트장으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야자수 나무 옆은 청룡해병대의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남의 가정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한국무적의 태권도장으로 쓰였던 곳은 지금 스타디움으로 변해있었다.

 “인걸은 간데없고 세월만 먼지속에 덥혀있는 이곳 이억만리 타국 땅. 30여년 전 우리의 선배 국군들이 피와 땀으로 얼룩졌던 곳이라니, 아하----?”

 다낭 시내 중심가에 ‘누 여인 동상’이 있었다. 누 여인은 일곱의 아들을 미군에 의해 희생된 여인으로써 베트남 통일의 애국에 상징으로 추앙 받고 있었다. 시내 가운데를 끼고 흐르는 항강을 따라가다가 쮸라이비치 해변을 향하였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과 우리의 청룡부대가 이 해변을 향해 상륙했다. 저만치 배에서 내려 완전무장한 우리 청룡이 총을 들고 용감무쌍하게 쮸라이 해변 백사장으로 보무도 당당히 ‘우리는 청룡이다’를 외치며 오는 듯 싶다.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59853_9559.jpg

 “삼천만의 자랑인 대한 해병대/ 얼룩무늬 번쩍이며/ 정글을 간다/ 월남의 하늘아래 메아리치는/ 귀신 잡던 그 기백 총칼 담고/ 붉은 무리 무찔러/  자유 지키려 삼군 앞장서/ 청룡은 간다/(중략).
                                           

2. 동양의 나폴리 나트랑과 계림이 울고 간 하롱베이!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61125_6704.jpg
 

 다낭시 쮸라이 비치 해변에서 끝없이 펼쳐진 남지나해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다가 근처에 있는 해변 레스토랑에 들렀다.

 “헬로우, 에에 -- 아이스 비어.  아니, 쪼 쫑 또이 하이 쩌이 비어 으업 란. (시원한 맥주 한 두어 병 주세요)?”

 맥주를 찾았다. 베트남에서는 호치민과 대도시를 제외하고는 영어가 잘 이루어지질 않기 때문이다. 그러자 젊은 여성 바텐더 베트남 맥주 ‘산미걸(San Miguel)’을 가져왔다. 옆에 있던 또 한 사람 20세 전후한 예쁜 처녀가 우리 곁에 다가와 자연스럽게 말을 건다. 함께 간 H신문사의 C부장이 말을 받아 주었다. 그는 일본 통역사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일본인 행세를 했다. 몸집이 작고 얼굴이 희어서 정말 일본인이냐고 묻자, 그녀의 국적(國籍)위장은 이내 들통이 난다. 왜냐면 C부장이 외국전문통 기자라서 웬만한 외국어는 다 할 줄 알아 일본어로 직접 대화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을 못했다. 베트남 현지인 처녀로 밝혀지는 순간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어색한 순간이었다. 그러다 필자가 소리를 질렀다.

 “아악, 저기 천정에 도마뱀이?” 

 “어어, 저쪽 벽에도 몇 마리 기어다니는데?”

 그러자 홀 안에 있던 이곳 처녀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웃으며 넘긴다. 밀림과 열대지방의 베트남에서의 도마뱀은 우리나라 집안의 파리 정도로 취급하고 있는 듯 했다. 필자는 베트남에서 현지인들과 일부러 많은 대화를 했는데 그들은 의외로 친절하고 순진했다. 거짓말로 외국인을 상대로 피해를 주는 등의 어슬픈 짓은 안했다. 필자가 만나본 이곳 사람들은 정글안의 싱그러운 잡초와 1년 사시사철 푸르런 논의 벼처럼 순박하고, 남지나해의 초록빛 물처럼 착함이 몸에 배었다고 생각되었다.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59985_1228.jpg

 우리는 시내에서 20여분 거리에 있는 오행산으로 향했다. 투이손과 킴손, 토숀, 호아손의 다섯산로 되어 있어 오행산이다. 또는 산 전체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어 마블 마운틴이라고 불리고도 있다.그 가운데 가장 큰 쿠이손(108m)의 동굴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어서 이곳 사람들이 오랫동안 신앙을 모셔왔음을 알 수 있다. 긴 돌계단과 산길을 오르면 전망대가 좋았다. 

 뾰죽한 4개의 산과 강, 들녘을 끼고 있는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은 가히 절경이었다. 조금 더 뒤로 가면 1968년 미군의 폭팔로 생긴 깊이 10-15m의 굴이 있다. 이곳에도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또 산기슭의 논누오크 마을에는 여러 가지 민예품을 팔고 있었다. 28도의 무더위로 콜라를 한 병 사 먹었으나 우리의  콜라맛이 아닌 매퀘한 향기가 들어있어 반은 남겼다.
 
 일행은 다낭 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참조각박물관’을 방문했다. 찬파의 유적으로부터 출토된 조각 예술품과 석상을 모아놓은 박물관이었다. 창이 없이 탁 트인 구조였다. 정원에는 꽃들로 만발하여 바람이 불 때마다 주위는 달콤한 향기로 가득차다. 내부에는 흰두교의 시바신과 가네쉬 신의 석상, 그림 등 참 예술의 우수한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인근의 미션 유적지와 함께 들러볼 베트남의 다낭문화의 한 코스이다.
 
 또 다낭 성당의 큰 위용도 보았다. 1923년 프랑스 통치시대에 세워진 하얀색의 카톨릭 교회인데 내부는 산뜻한 스테인 글라스로 꾸며져 있었다. 가는 날 마침 저녁미사가 있었다. 성당안과 미처 못들어간 많은 신도들이 마당에서 미사에 참여하고 있었다. 호텔을 가기 전 인근에 있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일행중의 뚱보 박 시인(경남 의령)이 엊그제 후에시 식당에서 먹은 베트남 고추장 ‘꽁비엣’ 맛을 못잊어 웨이타에게 시켰다.

 “짜오 안, 꽁비엣 주세요?”

 그랬더니 그 웨이터는 아무 응답을 안했다. 다시 ‘꽁비엣’이라고 소리쳤으나 그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는 것 같았다. 다시 옆에 있던 필자가 격앙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꽁비엣요 꽁비엣?”

 그러자 잠시 자리를 비웠던 가이드가 다가와 묻는다.

 “무엇을 찾는데 시끄러워요?” 

 “엊그제 후에시에서 먹었던 꽁비엣 고추장이 맛있길레 달라고 했더니 말귀를 못알아 듣네요.”

 그러자 가이드는 눈을 크게 뜨며 반문을 한다. 

 “꽁비엣은 베트남말로 잘 모른다는 뜻이예요?” 

 “그으럼, 후에시에서 ‘꽁비엣’ 하니까 고추장을 갖다준 사람은 무어요?” 

 “아, 그것은 피차 언어소통인 안된 상황에서 한국인이 고추장을 좋아하니까. 어쩌다 그렇게 된거죠. 눈 멀은 포수가 눈 멀은 참새를 어쩌다 잡은 것 처럼. 참— 내?”

 “오, 마이 갓!”
 
 (베트남에서 우리의 고추장과 비슷한 ‘맘’이란 것이 있다. 일종의 매운 젓갈류이다)

 베트남의 중부도시 다낭항을 뒤로 하고 동양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항구 나트랑(나쨩)을 향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발 아래에는 파아란 인도차이나 해변과 수목으로 무성한 정글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60044_8051.jpg 

 3,260㎞에 달하는 길고 긴 해변과 추옹송 산맥을 따라 남북으로 이어져 한없이 아름답고 자연이 풍요롭고 역동적인 나라 베트남. 30년 전 이곳 발 아래에서는 이른바 피 맺힌 월남전쟁이 일어났었다. 미국을 비롯하여 한국 등 자유진영의 우방들이 함께 참전 이 아름다운 땅 베트남 땅에 수 많은 폭탄과 총알 쏟아 부었다. 그러는 와중에서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과 민간인 수백만명이 참혹하게 저 아래 정글 속 불속에 던져져 죽어갔다. 언필칭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란 미명 아래서 말이다.
 
 비행기기 안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월남전 관련 시 두 편을 생각해 보았다. 위에 인용한 시는 '김준태'의 “베트남 추억”이다. 

​ 

 인생도 나라도 의지하지 못하고 사시던/ 남지나해 멀리멀리 팜 할아버지/ 나는 그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 물소도 취하게 만드는 독한 술을 마셨다/ 그리고 서로 보듬고 월남 말로 울었다/ 내가 마치 한국 전쟁의 고아인 것 처럼/ 퍔 할아버지를 껴안고 / 나는 시금치처럼 시들시들 해지고 싶었다/ 아아! 도마뱀이 그렇게 많이 울던 월남 땅/ 60년대 우리가 벌거숭이로 스쳐간 월남 땅//     -詩人 “김준태”의 베트남 추억  全文
 
 “못난놈은 얼굴만 보아도 서로 흥겹다”

 우회적 표현처럼 전쟁으로 인한 동족상잔의 고통, 외세의 간섭이란 서룸의 동류의식이 짙게 배인 작품이다. 또 뒤에 인용한 시는 베트남의 대표적 시인인 ‘레 아인 수앙’의 “흰옷”이란 작품이다. 필자가 베트남기행 마지막 날 사이공강 선상 크루즈 디너파티에서 만난 ‘구엔 반 봉“작가의 소설 ’사이공의 흰옷‘이란 책 뒷 표지에 발표된 시이다.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60173_5516.jpg

 한 다발의 비라 몇 장의 신문이/  감쪽같이 감춰진 가방을 껴안고/ 행운의 빛을 전하는/ 작은 파랑새처럼/ 나는 깊은 잠에 빠진 사이공거리/ 여기 저기를 날아다닌다// (중략) 하지만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사랑과 신뢰로 이어진 우리들의 삶/ 조국에게 동지에게 연인에게/ 굳게 맺은 나의 언약은 생명이 있는 한/ 변함이 없다// 죽음을 넘어 뇌옥의 쇠사슬로 끊고/ 암흑의 벽에/ 떨리는 손으로 쓴다 흰옷의 시를 / 방울방울 흐르는 선혈속에 뚜렷히/ 이 흰옷 더욱 빛나게 언제까지나. //
 -베트남 詩人 “레 아인 수앙”의 흰옷“중에서

 베트남 전쟁당시 그곳을 무대로 학생운동을한 여류작가 자신의 이야기와 그의 연인(현재 남편)을 주인공으로 써 발표된 작품이다. 당시 ’고 딘 디엠‘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하여 저항했던 양상이 우리의 70년대 학생운동과 비슷하였다. 두 작품이 민중의 서룸과 전쟁이 빚은 인간의 아픔을 밀도있게 그려낸 서사적 메타포 표현방식의 시 작품이었다.

 생각에 잠기는 사이 비행기는 나트랑 공항에 도착했다. 말 그대로 미국 남부도시 마이애미 항구를 닮았다고 한다. 백사장의 넓은 지평과 눈부신 해변과 시원시원하게 하늘을 향하여 뻗쳐진 야자수 나무 등이 휴양지로써는 최적지었다.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60218_5825.jpg

 월남전 당시 한국군사령부와 십자성부대가 주둔했던 곳으로써 인구는 약 30만의 후카인성 성도(省都)이다. 굴지의 리조트 지역이기도 하며 명칭은 영어식 발음이므로 나트랑보다 나짱이 더 잘 통한다. 고대 참 왕국의 유적지가 많고 파랗게 빛나는 바다속을 들여다보면 그 속에 빨려들 것 처럼 옥주색이다. 

 해변은 알록달록한 파라솔이 있고 건너편에는 작은 섬들이 몇 개 떠 있었다. 6㎞에 달하는 고운 모래사장에는 낭만적인 노천카페들이 많아 여행객들의 천국 같았고 이곳 해변도로에는 ‘트레인 파우’라는 거리가 있다. 월남전 당시 우리의 군인들이 태권도를 이 지역에 보급하기 위해 지었던 태권도장들이 아직도 있었다.

 다음날 카이 강 하구에서 빨간 파란색의 많은 어선을 보며 식당에서 신선한 해산물인 대하와 바다제비, 비둘기를 재료로 만든 ‘이엔보우카우’요리라는 명물로 별식을 먹고서 하노이 ‘하롱베이’로 가기 위해 비행기를 탔다.

 베트남의 수도인 하노이에 내려 바이차이로 가는 버스를 타고 3시간 가량 갔다. 하롱베이는 얼마나 아름답기로 유명한지 중국의 명산인 태산이 와서 무릅을 끓고, 계림이 와서 울고 간 곳이라고 한다. 3천여개의 석회암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펼쳐진 이곳은 1천여개의 기암이 잔잔한 해면에 그 모습을 비추고 있어 가히 환상적이었다. 

 바다의 숲으로써 용이 하늘에서 내려와 적을 물리치고 보석을 얻었는데 그것이 기암이 되어 바다부터 외적을 막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수석을 전시해놓은 듯한 기암괴석과 각각 독특하게 죽순같이 솟아있는 섬들은 동양화의 한 장면 같았다. 또 이 부근이 미국의 월남전 개입 단초를 제공한 그 유명한 ‘통킹만’이다. 

 3. 해가 뜨고 해가 지는 역동적인 아름다운 메콩강 텔타와 인도차이나의 숨겨진 보석 베트남을 뒤로하고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60416_116.jpg

 
인도차이나반도에서도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곳으로 유명한 베트남 메콩강 델타. 쌀과 어류의 생산지대인 ‘메콩 델타지역’인 ‘미토’ 와 ‘빈룽’을 가기 위해서 아침 일찍부터 행장을 챙겼다. 드넓은 평야와 계곡 사이사이 강가를 따라 조각배들이 끝없이 이어져 신선한 고기를 낚는 메콩강 즐기의 원주민들. 저 해맑은 하늘만큼이나 순수하고 티 없는 그들을 만난다는 마음에 필자는 벌써부터 마음이 들떴다.

 차량은 필자의 고집으로 호치민에서 가장 가까운 남부지방의 휴양지인 해안도시 ‘붕타우’를 들렀다. 우리나라가 지난 1964년 맨 처음 월남전에 국군을 투입하면서 태권도와 의료반을 보낸 곳이 바로 이곳 붕타우였기 때문이다.

 요컨데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한 단초가 이른바 ‘통킹만’사건(훗날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이었다는 설이 있다.)이었다면, 우리나라는 태권도와 의료반으로 전쟁수행을 위한 민간단체 부분의 교류라는 미명 아래 바로 이곳에 따이한의 얼굴을 비로소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곳 붕타우는 1년 내내 해수욕을 즐길 수 있어 월남전 당시 주월 한국군의 장성과 미군의 고위층들이 수시로 ‘전쟁과 휴양은 별도’라는 신조어를 낳으면서 이곳 남국에서의 에메랄드 녹색 바다와 백사장 파라솔 아래서 여인들과 사랑과 낭만을 즐겼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많은 해수욕객으로 붐비고 있다. 이곳은 베트남에서 나트랑과 함께 남국의 경관을 즐기는 굴지에 해안 휴양지가 되었다. 또한 붕타우는 석유와 유전으로 유명하여 수시로 외국의 유조선과 대형 크레인이 출입을 하고 있었다. 메콩델타 입구의 도시인 미토에 도착 퍼와 비슷한 쌀가루로 만든 후티유면으로 허기를 채웠다. 망고. 랑트란 등이 풍부한 이곳은 각종 신선한 과일로도 유명하다. 특히 미토의 문화관광 백미(白眉)는 ‘메콩크루즈’이다.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60295_686.jpg

 

 우리는 작은 모터가 달린 나무배를 타고 타이손섬을 향하여 출발했다. 강 양쪽으로 펼쳐지는 정글을 바라보면서 갈색빛이 짙게 베어나는 메콩가의 장엄함과 웅대함을 보고 놀랐다. 일행은 옆으로 이따금 스쳐 지나가는 벤처행 페리와 그믈을 던지고 검으테테한 얼굴의 어부들을 보며 강바람에 심호홉했다. 다시 미토에서 메콩강 지류의 하나인 티엔잔(前江)페리를 타고 건너 빈롱으로 갔다. 강가에는 작은 배들이 노를 저어 천천히 강을 건너갔다. 강위로 오가는 배와 어부들의 모습이 영화속의 한 장면 같이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했다.

 빈롱의 아침은 해가 뜸과 동시에 강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뒤로하고 아침 안개속을 오가는 배의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마침내 강가의 녹색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 할 때 쯤 시장에서는 베트남 메콩강의 하루를 건져 올리기 시작했다. 인도차이나반도의 숨겨진 보석 베트남 기행을 끝내고 추억의 이곳을 뒤로 남기며 내일이면 이곳을 떠난다. 이억만리 멀리 비행기로 5시간을 허겁지겁 달려왔던 밀림과 아오자이의 나라 베트남.

 베트남은 지난 1964년 월남전이 발발하면서 ‘따이한’이란 이름으로 우리의 많은 국군이 사망하고 전상자가 발생하는 아픈 역사가 있다. 또 이 뿐만이 아니라 전쟁의 후유증이 지금껏 있다. 그 예의 대표적인 것이 월남전 당시 무분별하게 살포되었던 이른바 ‘오랜지제’라고 불리던 고엽제의 피해이다. 

 이 고엽제의 피해를 미리 인지못했던 순진한 우리 국군들은 이 약제를 모기에 안물리기 위해 몸에 바르거나 심지어는 그냥 먹기까지 했다고 한다. 현재 약 1만여명이 이 병으로 인하여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어느 병사가 한 말이 생각이 난다.

 “나는 죽어서 천당에 갈 것이다. 왜냐면 나는 이승에서 ‘월남지옥’에 있었으니까!”

 또 이 뿐만이 아니다. 베트남전과 동시에 발생했던 한인(韓人) 2세, 3세로 불리는 라이따이한이 현재 베트남에 1만 5천여명이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한국인도 아니고 베트남인도 아닌 그저 혼열아라는 따가운 눈총속에서 학교와 취업, 결혼 등 각종 베트남사회의 불이익 속에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일행은 이들의 현장을 보기 위하여 한국의 김용관 목사님이 라이따이한을 위해 설립 운영한다는 ‘휴먼 직업학교’를 찾기로 하고 호치민시에서 버스를 탔다. 2시간여 달려간 그곳엔 역시 우리의 모습을 닮은 라이따이한 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었다.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60638_3292.jpg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60096_0738.jpg 

 

 

 미싱돌리기와 텔레비전 및 라디오 부속품의 조립, 컴퓨터조작, 전기반으로 나뉘어 더운 기온에서도 구슬땀을 흘리며 공부하는 우리의 모습을 닮은 그들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른바 월남전 당시 따이한인 ‘김 중위’ ‘박 병장’의 아들과 딸 쯤으로 회자(膾炙)되는 이들을 누가 이렇게 베트남의 구석에 몰아넣고 이처럼 정신적 물질적 빈곤속에서 살아가게 했는가? 월남전 당시의 국군들을 탓하기보다 명분 없는 전쟁의 사지(死地)로 내몰은 당시의 위정자가 미웠다.

 아픈 가슴을 뒤로하고 휴면 직업학교를  나와 차이나타운과 벤탄시장을 거쳐 19세기 중반 프랑스 통치시대에서부터 지어진 멋진 식민지풍인 콜로리얼 가옥들이 즐비한 호치민 시내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어 밤에는 사이공강 선상 디너 크루즈 일정에 나섰다. 

 특히 베트남 전쟁의 허(虛) 실(失)을 국내에 최초로 알린 호치민대학 유학생 ‘구수정’씨와의 만남과 베트남 전쟁을 실제 참전하면서 느낀 내용을 소설로 출판하여 화재를 모았던 ‘사이공의 흰옷’에 저자 ‘구엔 반 봉’ 부부를 만난다.

 사이공강의 아름다운 야경에 취했다. 강 양쪽으로 많은 배와 그 뒤로 네온싸인이 반짝거렸다. 강가 대형 건물 옥상에는 ‘DAEWOO' 또는 ’LG'의 우리나라 굴지의 기업 광고판이 눈 에 띄어 역시 ‘한국’이라는 자부심도 들었다.’ 

  대형 초호화 관광선인 크루즈가 강가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면서 선상 디너쑈는 절정에 오르고 선상 중앙 무대에서는 베트남 특유의 전통노래와 악기연주가 이어지고 있었다.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60358_3252.jpg

 잠시 후 베트남에서 ‘전쟁의 슬픔’에 저자인 ‘바오닌’과 함께 대표적인 작가로 떠오르는 ‘구엔 반 봉’ 부부가 ‘한겨레 21’ 호치민 통신원이자 유학생인 구수정씨와 함께 나타났다.

 우리와 반갑게 악수를 하고 술을 나누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베트남전쟁의 문제점과 미국, 그리고 한국의 참전 또 베트남 민족의 아픔을 함께 얘기했다. 조용하면서 마음씨 고와 보이는 표정이 밝은 이들 부부를 보면서 ‘과연 전쟁이 있었는가?’하고 스스로 반문했다. 구엔 반 봉은 우리들에게 자신의 저서인 ‘사이공의 흰옷’이란 책자에 서명해주며 얘기했다.
 
 호치민에서의 마지막 밤을 끝으로 다음날 우리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월남전쟁과 한국, 그리고 미국, 또 눈망울이 초롱했던 라이따이한의 그늘진 얼굴들.

 인도차이나반도의 숨겨진 보석, 3.260㎞에 달하는 아름다운 해안선, 변화무쌍한 자연환경, 역동적이면서 풍광이 수려하고, 메콩델타 지역 등 자연이 풍요로운 나라로 잘 알려진 베트남 구석구석의 진면목을 우리는 멋과 맛깔스럽게 보았다.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60854_0454.jpg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60854_9025.jpg 

 베트남 이야기는 ‘신베트남 기행’으로 끝이 나는 게 아니고 필자의 소설집 ‘라이따이한’으로 다시 만난다. 끝으로 월남전에 참전하여 전사하신 국군장병과 유가족에게 고개 숙여 추도와 위안을 드리고, 아울러 지금도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에게도 정중히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아오자이를 몸에 걸치고 필자와 잠시 연정을 나누었던 환상적인 그녀 ‘환티홍 꽁까이’
 
 “잘 있으시오. 나는 간다아-- 깔은 몽 (감사합니다.)”
   (마지막 회)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60569_8548.png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60503_5848.jpg

fc40f3597905d8d9e8e12cdf1d21a27f_1595860770_7844.gif
김우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