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선/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다

오양심 2019-02-03 (일) 10:53 5년전 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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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선/ 명동관 대표 한세연의 한식세계화 본부장>

정(情)이
익어가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나요?

일천 구백칠십 팔년
십일월 이십사일
장호원 고등학교
상과 반 동창생들이
나이 오십 줄에
강릉 경포대에 간 날이었어요.
느닷없이 첫눈이 내리더라고요.
서로 얼싸안고
서설(序說)이라고 말했어요.

그때 그 시절이
생각 난다고요?


책상 앞에 앉아서 밤을 하얗게 새워가며
주산과 부기 그리고 타자 공부를 했던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오늘처럼
하늘에서 마구잡이 춤을 추며 땅으로
내려온 눈이 물 불 가리지 않고
경포대 앞바다로 뛰어든 것처럼
남학생 여학생 모두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었지요.

추억은 아름답다고요?


굶기를 밥 먹듯 했던
오뉴월 보릿고개를
대한민국 땅에 발도
못 붙이게 했던 동창생들이
강릉 바닷가에서 만난 나이테
하나씩 가슴팍에 새기며
무르익은 정(情)으로
추억을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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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원고등학교 상과반 동창생들이다>

시(詩)는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쓰는 것도 아니고, 온몸으로 쓰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이인선은 강릉에서 동창회 모임을 했던 그 날을 빛내고 있다. 농사를 지어서 입에 풀칠도 못했던 그 때를 회상하며 <이 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다>라는 제목을 달아 온 몸으로 글을 쓴 것이다.

이인선은 장호원고등학교 상과반에 다녔다. 동창생끼리 강릉에 갔는데 첫눈을 맞이한 것이다. 서로 얼싸안고 상서로운 조짐인 서설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은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도 나이가 몇 살인지, 고향이 어디인지, 학교는 어디 나왔는지 신상부터 캔다. 동창생끼리 만났으니 정이 익어가는 소리를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다.

이인선은 2연에서 상과반을 다녔다고 적고 있다. 그때 우리나라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경제든 교육이든 육이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후였다. 초근목피로 끼니를 이어갔고, 농사를 지어도 보릿고개를 이겨내지 못했다. 근면, 자조, 자립정신을 바탕으로 정신적인 힘을 발휘하여 새마을운동을 전개했지만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하지 못했다. 이인선은 하늘에서 내려온 눈이, 물 불 가리지 않고 경포대 앞바다로 뛰어든 것처럼, 남학생 여학생 모두가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고 말한다.

이인선은 끊임없이 자신과 타인의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는 본다. 삶에 대한 희로애락으로 굶기를 밥 먹듯 했던 오뉴월 보릿고개에 대한민국의 건설현장에서 동창생들이 일조를 했다고 적고 있다. 지난해를 보내고 2019년이라는 새로운 시간 앞에서 나이테 하나씩 가슴팍에 새기며 무르익은 정(情)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었다는 자화상이 눈앞에 잔잔하게 그려진다.

2019년은 기해년(己亥年) 황금 돼지해이다. 태평성대가 눈앞에 펼쳐지면 좋으련만, 혁명에 가까운 4차 산업 시대에 정치, 경제, 문화 등이 빠르게 변모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이인선처럼 겸허한 자세로 자화상을 그려야 한다. 2019년에는 우리 모두가 그린 자화상으로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다>는 명작이, 탄생되기를 기대한다.

<오양심/ 前건국대학교 통합논술 주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