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영 문학비평] 시여! 침을 뱉어라

안경수 2018-11-11 (일) 17:31 5년전 1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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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1921년 ~ 1968년)/ 소시민적 비애와 슬픔을 모더니즘적인 감각으로 노래했으며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현실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표현한 참여시를 썼다>

[오코리아뉴스=안경수기자] 나의 시에 대한 사유(思惟)는 공개할 만한 명확한 것이 못 된다. 하지만 조금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나의 모호성은 시작(詩作)을 위한 나의 정신구조의 상부 중에서도 가장 첨단의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무한 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유일한 도구를 상실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가령 교회당의 뾰족탑을 생각해 볼 때, 시의 탐침(探針)은 그 끝에 달린 십자가의 십자의 상반부의 창끝이다. 십자가의 하반부에서부터 까마아득한 주춧돌 밑까지 건축 실체의 부분이 우리들의 의식에서 아무리 정연하게 정비되어 있다 하더라도, 시작상(詩作上)으로는 명석(明晳)의 개진은 아무런 보탬이 못 되고 오히려 방해가 되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 시를 논하는 사람이 아니며,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는 그는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이 물음이 포괄하고 있는 원주가 바로 우리들이 오늘의 세미나의 논제인, 시에 있어서의 형식의 내용의 문제와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은 시의 형식으로서의 예술성과 동의어가 되고,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의 현실성과 동의어가 된다는 것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은 나는 20여 년의 시작 생활을 경험하고 나서도 아직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모른다. 똑 같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 되지만,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시를 못 쓰게 된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여태까지의 시에 대한 사변(思辨)을 모조리 파산(破算)을 시켜야 한다. 혹은 파산을 시켰다고 생각해야 한다. 말을 바꾸어 하자면, 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온몸으로 동시에 무엇을 밀고 나가는가? 나의 모호성을 용서해 준다면 <무엇을>의 대답은 <동시에>의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 시의 사변에서 볼 때, 온몸에 의한 온몸의 이행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바로 시의 형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번에는 시를 논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자. 나는 이미 <시를 쓴다>는 것이 시의 형식을 대표한다.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이라는 전제를 한 폭이 된다. 내가 시를 논하게 된 것은 속칭 <시평>이나 <시론>을 쓰게 된 것은 극히 최근에 속하는 일이다.

이런 의미의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 본질적인 의미에 속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구태여 그것을 제1의적인 본질적인 의미 속에 포함시켜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은 논지의 진행상의 편의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구태여 말하자면 그것은 산문의 의미이고 모험의 의미이다.

시에 있어서의 모험이란 말은 세계의 개진(開陳), 하이데거가 말한 <대지(大地)의 은폐> 의 반대되는 말이다. 엘리엇의 문맥 속에서는 의미 대 음악으로 되어 있다. 엘리엇도 그의 온건하고 주밀한 논문 「시이 음악」의 끝머리에서 <시는 언제나 끊임없는 모험 앞에 서 있다>라는 말로 <의미>의 토를 달고 있다.

나의 시론이나 시평이 전부가 모험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들을 통해서 상당한 부분에서 모험의 의미를 연습을 해보았다. 이러한 탐구의 결과로 나는 시단의 일부의 사람들로부터 참여시의 옹호자라는 달갑지 않은, 분에 넘치는 호칭을 받고 있다.

 산문이란, 세계의 개진이다. 이 말은 사랑의 유보(留保)로서의 <노래>의 매력만큼 매력적인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산문의 확대작업은 <노래>의 유보성에 대해서는 침공적(侵攻的)이고 의식적이다. 우리들은 시에 있어서의 내용과 형식의 관계를 생각할 때, 내용과 형식의 동일성을 공간적으로 상상해서, 내용이 반, 형식이 반이라는 식으로 도식화해서 생각해서는 아니 된다.

<노래>의 유보성, 즉 예술성이 무의식적이고 은성적(隱性的)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반이 아니다. 예술성의 편에서는 하나의 시작품은 자기의 전부이고,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시의 예술성이 무의식적이라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가 시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자기가 시의 기교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것은 시의 기교라는 것이 그것을 의식할 때는 진정한 기교가 못 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시인이 자기의 시인성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거울이 아닌 자기의 육안으로 사람이 자기의 전신을 바라볼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가 보는 것은 남들이고, 소재이고, 현실이고, 신문이다. 그것이 의식이다.

현대시에 있어서는 이 의식이 더욱더 정예화(精銳化)때에 따라서는 신경질적으로까지 되어 있다. 이러한 의식이 없거나 혹은 지극히 우발적이거나 수면(睡眠) 중에 있는 시인이 우리들의 주변에는 허다하게 있지만 이런 사람들을 나는 현대적인 시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현대에 있어서는 시뿐만이 아니라 소설까지도 모험의 발견으로서 자기 형성의 차원에서 그의 <새로움>을 제시하는 것이 문학자의 의무로 되어 있다. 지극히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는 말이지만 나는 소설을 쓰는 마음으로 시를 쓰고 있다.

그만큼 많은 산문을 도입하고 있고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유가 없다. 여기에서 또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되지만, <내용의 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말은 사실은 <내용>이 하는 말이 아니라 <형식>이 하는 혼잣말이다.

이 말은 밖에 대고 해서는 아니 될 말이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래야지만 <너무나 많은 자유가 있다>는 <형식>을 정복할 수 있고, 그때에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간신히 성립된다. <내용>은 언제나 밖에다 대고 <너무나 많은 자유가 없다>는 말을 계속해서 지껄여야 한다.

이를테면 38선을 뚫는 길인 것이다. 낙숫물로 바위를 뚫을 수 있듯이, 이런 시인의 헛소리가 헛소리가 아닐 때가 온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헛소리다! 하고 외우다 보니 헛소리가 참말이 될 때의 경이. 그것이 나무아미타불의 기적이고 시의 기적이다. 이런 기적이 한 편의 시를 이루고, 그러한 시의 축적이 진정한 민족의 역사의 기점(起點)이 된다. 나는 그런 의미에서는 참여시의 효용성을 신용하는 사람의 한 사람이다.

서두에서 시에 대한 나의 사유가 아직도 명확한 것이 못되고, 모호성은 무한 대의 혼돈에의 접근을 위한 도구로서 유용한 것이기 때문에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는 말을 했다. 모호성의 탐색이 급기야는 참여시의 효용성의 주장에까지 다다르고 말았다. 나는 아직도 ,<여태껏 없었던 세계가 펼쳐지는 충격>을 못 주고 있다.

이 시론은 아직도 시로서의 충격을 못 주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여태까지의 자유의 서술이 자유의 서술로 그치고 자유의 이행을 하지 못한 데에 있다.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자유이 이행에는 전후좌우의 설명이 필요없다. 그것은 원군(援軍)이다. 원군은 비겁하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이 지루한 횡설수설을 그치고, 당신의, 당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일이다. 당신이, 당신이, 당신이 내 얼굴에 침을 뱉기 전에. 자아 보아라, 당신도, 당신도, 당신도, 나도 새로운 문학에의 용기가 없다. 이러고서도 정치적 금기에만 다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새로운>문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형식>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의 성립이 사회조건의 중요성을 로버트 그레이브스는 다음과 같은 평범한 말로 강조하고 있다. <사회생활이 지나치게 주밀하게 조직되어서 시인의 존재를 허용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게 되면, 그때는 이미 중대한 일이 모두 다 종식되는 때다.

개미나 벌이나, 혹은 흰개미들이라도 지구의 지배권을 물려받는 편이 낫다. 국민들이 그들의 <과격파>를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것은 나쁜 일이고, 또한 국민들이 그들의<보수파>를 처형하거나 추방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나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고립된 단독의 자신이 되는 자유에 도달할 수 있는 간극(間隙)이나 구멍을 사회기구 속에 남겨놓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더 나쁜 일이다. 설사 그 사람이 다만 기인(奇人)이나 집시나 범죄자나, 바보 얼간이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인용문에 나오는 기인이나 집시나 바보 멍텅구리는 <내용>과 <형식>을 논한 나의 문맥 속에서는 물론 후자 즉, <형식>에 속한다. 그리고 나의 판단으로는, 아무리 너그럽게 보아도 우리의 주변에서는 기인이나 바보 얼간이들이 자유당 때하고만 비교해 보더라도 완전히 소탕되어 있다. 부산은 어떤지 모르지만 서울이 내가 다니는 주점은 문인들이 많이 모이기로 이름난 집인데도 벌써 주정꾼다운 주정꾼 구경을 못한 지가 까마득하게 오래된다. 주정은 커녕 막걸리를 먹으로 나오는 글쓰는 친구들의 얼굴이 메콩 강변의 진주를 발견하기보다도 더 힘이 든다. 이러한 <근대화>의 해독은 문학주점에만 한한 일이 아니다.

그레이브스는 오늘날의 <서방측의 자유세계>에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없는 것을 개탄하면서,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서방측 자유세계의) 시민들의 대부분은 군거(群居)하고, 인습에 사로잡혀 있고, 순종하고, 그 때문에 자기의 장래에 대해 책임을 질 것을 싫어하고, 만약에 노예제도가 아직도 성행한다면 기꺼이 노예가 되는 것도 싫어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종교적, 정치적, 혹은 지적(知的) 일치를 시민들에게 강요하지 않는 의미에서, 이 세계가 자유를 보유하는한 거기에 따르는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혼란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자유당때의 무기력과 무능을 누구보다도 저주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지만, 요즘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도 자유는 없었지만 <혼란>은 지금처럼 이렇게 철저하게 압제를 받지 않은 것이 신통한 것 같다. 그러고 보면 <혼란>이 없는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의 건설은, 시멘트 회사나 발전소가 없는 혼란보다 조금도 나을 게 없다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러한 자유와 사랑의 동의어로서의 <혼란>의 향수가 문화의 세계에서 싹트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미미한 징조에 불과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극히 중대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 진정한 시의 임무인 것이다.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바로 그처럼 형식은 내용이 되고 내용은 형식이 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 시론도 이제 온몸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순간에 와 있다. <막상 시를 논하게 되는 때에도> 시인은 <시를 쓰듯이 논해야 할 것>이라는 아의 명제의 이행이 여기에 있다. 시도 시인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여러분도 시작하는 것이다.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기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1968년 4월 부산에서 펜클럽 주최로 행한 문학 세미나에서 발표한 원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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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인소개>


김수영은 1921년 11월 27일 서울 관철동 출생. 효제보통학교를 거쳐 선린상고를 졸업한 후에 일본에 건너가 1941년 동경상대(東京商大)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1943년 학병징집을 피해 귀국했다.

이듬해 가족과 함께 만주 길림성으로 이주하여 길림 제육고에서 교원을 지냈고 연극운동도 했다.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서울에서 거주하며 통역일을 하였고, 연희대(延禧大) 영문과 4년에 편입(1945)했으나 중퇴했다. 1945년 『예술부락』에 시 「묘정(廟庭)의 노래」를 발표하였으며, 1949년에는 김경린(金璟麟)‧박인환(朴寅煥) 등과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여 모더니스트로 각광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 중 미처 피난하지 못해 북한군에 징집, 포로가 되었다가 거제도 수용소에서 석방되었으며(1952), 그곳에서 병원장 통역, 석방 후에는 미8군 통역, 선린상고 영어교사로 근무했다. 1954년 환도 후 주간 태평양, 평화신문에서 근무했고, 1955년 이후 자택에서 양계(養鷄)를 하면서 시작(詩作)‧번역‧평론에 전념하였다.

이때 그 동안 발표한 작품을 모아 시집 『달나라의 장난』(1959)을 간행했고, 제1회 시협(詩協)상을 수상하였다. 이 시기의 그의 작품은 소시민적 비애와 슬픔을 모더니즘적인 감각으로 노래하고 있으며, 「헬리콥터」, 「폭포」 등이 대표작이다.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현실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표현한 참여시를 쓰기 시작한다. 「하······그림자가 없다」, 「육법전서(六法全書)와 혁명」, 「푸른 하늘을」 등이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서 혁명과 사회변화,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적극적 관심과 열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의 한 전환점을 이루는 이 시기의 지속적인 주제는 사랑과 자유인데, 자유는 그의 시적‧정치적 이상으로, 사랑은 그 자유의 실현을 억압하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인식론적 사랑으로 나타나고 있다.

5‧16 군사정변 후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그는 자유의 실현을 불가능하게 하는 ‘적(敵)’에 대한 증오와 그 적을 수락할 수밖에 없는 현실 사이에서 연민‧탄식‧풍자 등을 작품화하게 되는데, 「그 방을 생각하며」, 「적」 등이 이 시기의 작품이다.

이후 그는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랑을 노래한 「거대한 뿌리」, 「현대식 교량」, 「사랑의 변주곡」 등을 썼고, 1968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타계하기 직전에 쓴 「풀」은 1970년대 민중시의 길을 열어놓은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그밖에도 「시여, 침을 뱉어라」 등의 평론을 통해 참여시와 시의 현대성을 주장했다. 브라운의 『20세기 문학평론』(유령‧소두영 공역, 중앙문화사, 1957), A. 테이트의 『현대문학의 영역』(이상옥 공역, 중앙문화사, 1962) 등의 번역서를 냈다.

사후에 『거대한 뿌리』(1974), 『시여, 침을 뱉어라』(1975)를 비롯한 몇 권의 시선집‧산문집이 나왔고, 1981년 민음사에서 두 권의 『김수영전집』이 간행되었다.<출처: 현대문학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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